사군자와 로코코, 혼종의 미
코디최의 <하드 믹스 매스터 시리즈 2: 노블레스 하이브리디제>(9. 24~10. 26)전이 PKM갤러리에서 열렸다. 2016년 이후 3년 만의 한국 개인전을 맞아 새로운 회화 연작 <노블레스 하이브리디제> 16점을 공개했다. 17~18세기 동서양의 두 매스터(master) 문화인 ‘사군자’와 ‘로코코’를 하나의 화면에 충돌시켜 혼종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한다. / 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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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lesse Hybridige #19728A>(2019) 앞에 선 코디최
1983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겪은 동서양의 문화 충돌을 지난 30여 년간 작업의 핵심 주제로 탐구해 온 작가 코디최. 그가 최근 PKM갤러리에서 개인전 <하드 믹스 매스터 시리즈 2: 노블레 하이브리디제>를 열고 새로운 회화 연작을 공개했다.
“나에겐 지금쯤이 작가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기를 맞은 시점인 것 같다. 지난 30년은 이종 문화가 충돌하면서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문제를 약간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드러내 왔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1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시대가 굉장히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에는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이 많았다면, 오늘날 혼종의 상태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긍정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조명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3년 전 개인전 <채색화: 아름다운 혼란>에서 혼란이 또 다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번 전시는 확실히 제3의 문화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신작 대리석 회화 <노블레스 하이브리디제>는 작가의 아들이 어릴 적 그린 컴퓨터 이미지와 스승 마이크 켈리(Mike Kelley)의 <Garbage Drawing>(1988)을 디지털 믹스한 <하드 믹스 매스터 시리즈 1>의 후속 연작이다. 요즘에야 널리 쓰이는 제작 기법이지만, 그가 작업 아이디어를 처음 구상한 건 1997년이었다. “세계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막 넘어가던 시기에 당시 유치원생 아들과 동물원에 다녀왔다. 그런데 아이가 그곳에서 본 호랑이를 그리겠다더니 컴퓨터에서 호랑이와 정글 이미지를 다운받아 합성해서 프린트하고는 호랑이라고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당연히 종이에 그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상상력이 아니라 데이터가 창조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어떻게 회화에 정당성을 만들어 낼 것인지 고민했다.” 이후 작가는 아들의 이미지 데이터를 모두 자신의 컴퓨터로 옮기고, 1999년 데이터로 그린 그림 <Database Painting>을 발표했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그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이메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색다르게만 보고 이해는 잘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조금씩 작업해 오다가 최근 국제무대에서 젊은작가들이 데이터를 활발하게 사용하는 흐름을 보고 작업을 다시 조명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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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lesse Hybridige #19710A> 인조 대리석에 유채, 캐슈 페인트, 디지털 프린트 67.7×76cm 2019
대학에서 가르침을 준 선생과 데이터 활용에 직접 영감을 제공한 아들, 두 스승을 섞어 <하드 믹스 매스터 시리즈 1>을 만들었다면, 이번 전시의 두 번째 시리즈는 작가에게 가장 큰 문제의식인 동서양의 문화에서 매스터를 선정했다. “대표적인 한국 또는 동양미술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사군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기 서양에서는 로코코가 귀족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었다. 그런데 사군자가 지조와 절제를 강조하는 데 비해 로코코 미술은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의 극치였다. 비슷한 시대지만 너무 다른 지배 계급의 가치관과 표현 방법이 재밌었다. 양극단에 있는 문화를 하나의 공간 안에 배치했을 때 여전히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결과적으로 굉장히 아름답게 나타났다.”
두 개의 시공간이 생동하게 교차하는 작품을 보고 관객은 먼저 시각적 아름다움을 탐미하겠지만, 작가는 단순히 형식적인 문화 병치에만 그치지 않는다. “문화를 가장 빠르게, 가깝게 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 특권 계층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부유층이 미술판을 움직이는 시대라면, 그들이 미술을 좀 더 제대로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상류층의 예술 사조를 작업 소재로 삼았다. 작품 타이틀 <노블레스 하이브리디제>에는 ‘노블레스’가 동서양의 예술적 혼종인 ‘하이브리디제’를 깊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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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lesse Hybridige #19511A> 인조 대리석에 유채, 캐슈 페인트, 디지털 프린트 89.7×76.2cm 2019
서로 다른 장르를 충돌시키기 위해 작가는 각각의 성질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아 2년간 연구에 몰입했다. 먹은 흘러넘쳐 형태를 잡기 힘들고 한지는 로코코 스타일을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럽의 전통 기술 중 돌벽이나 대리석을 사용하는 기법과 프레스코 기법을 테스트했다. 그 결과 서양의 전통 안료인 유채, 동양 옻칠의 대체제인 캐슈, 현대식 기법 UV프린트가 인조 대리석을 바탕 삼아 하이브리드 문화를 구축했다. “작은 작품은 25kg, 큰 작품은 50kg까지 나간다. 무게 때문에 지금보다 사이즈를 더 늘리기는 힘들지만, 누군가 대작을 원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대리석이기 때문에 건물도 지을 수 있다. 조각조각 그린 다음 대리석 가루로 틈새를 메우면 그게 한 판이 된다.”
한편 전시에는 작가의 대표 조각작품 <Cody’s Legend vs. Freud’s Shit Box>(1994/2014)와 <The Thinker 2019>(2019)도 출품됐다. 작가가 문화적 소화 불량을 겪으면서 미술의 혼종성을 치열하게 실험하던 시기의 조각을 청동으로 재제작한 상징적인 작품이다. 신작 회화 또한 초창기 문화 충돌의 맥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고민이 현재까지 발전되어 온 양상을 압축해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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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최 개인전 <하드 믹스 매스터 시리즈 2: 노블레스 하이브리디제> 전경 2019 PKM갤러리 _코디최(Cody Choi) / 1961년 출생. 1980년 고려대 사회학과 재학 중 도미. 캘리포니아 리오 혼도 칼리지 예술문화학 및 아트센터디자인대학 예술 전공. 켐니츠미술관(2017), 마르세유현대미술관(2016),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2015) 등에서 개인전 개최.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7), 창원조각비엔날레(2016), 부산비엔날레(2014) 등 참여. 저서 《동시대 문화 지형도》 (컬처그라퍼 2010) 등. 오는 12월 베이징투데이아트미술관 그룹전 <The 4th Today’s Documents> 참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