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레토릭’ 전유하기
미디어에 노출된 정치인들의 행동을 각색한 퍼포먼스와 영상을 제작해왔던 리즈 매직 레이저.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갤러리 VSF서울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 출품작 <Mine>과 <Handle/Poignee>를 포함해 작가의 지난 10년간 주요 작품을 통해 정치와 권력, 미디어에 대한 그의 관심사가 어떻게 확장했는지 살펴본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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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Handle)> 싱글채널 비디오 14분 21초 2018
전 유럽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와중에도 연설을 통해 영국인의 희망을 북돋웠던 처칠, 현대 민주주의 정신의 상징으로 남은 게티즈버그 연설의 주인공 링컨. 이들은 화려한 언변과 카리스마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정치가다. 이처럼 연설은 정치가에게 가장 유효하고도 강력한 정치적 행위 중 하나다. 좌중을 압도하는 연설의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안정적인 톤의 발성, 적절한 제스처와 시선 처리 등 대중에게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 존재한다. 미디어의 발전은 정치인들이 뉴스 등의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수를 증가시켰고, 그들은 극대화된 긍정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더욱 치밀하고 유려한 전략을 짜는 데 여념이 없다.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리즈 매직 레이저(Liz Magic Laser)는 정치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를 주로 퍼포먼스와 영상을 통해 재현한다. 연설, 기자회견, 뉴스에 출연한 장면들을 레퍼런스 삼아 정치인 특유의 정돈된 몸짓과 언어를 각색해 정치 권력의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리즈 매직 레이저>(2. 1~3. 7)가 한남동 독서당로에 자리한 갤러리 VSF(Various Small Fires)서울에서 열렸다. 전시는 작가의 초기 관심사였던 개인에 대한 권력의 감시적 시선을 드러내는 <Mine>(2009)과 대중의 학습된 정치적 성향과 행동 패턴에 대한 관심사를 확장시킨 <Handle/Poignee>(2018) 등 영상 2점을 소개한다. 작가는 우리의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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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Handle)> 싱글채널 비디오 14분 21초 2018
2009년 발표한 영상 <Service>는 어느 남녀 커플이 지인들을 초대해 디너파티를 여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배우들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읊는데, <아웃브레이크>(1995), <아마겟돈>(1998), <투모로우>(2004) 등 유명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대본을 발췌,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이하고도 부조리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뜬금없이 제공(service)되는 음식을 우악스럽게 먹는 손님들의 장면은 실제 세계와 영화 속 가공된 세계 모두에서 끊임없이 반복 출현하는 미국식 영웅주의를 신랄하게 비꼰다.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I Feel Your Pain>(2011) 또한 이와 흡사한 구조를 갖는다. 두 배우는 마치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짐에 이르는 연인 관계의 진전을 연기하고, 그 대사는 정치적 갈등을 연상시키는 말들이다. 다른 배우들 또한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사라 페일린(Sarah Palin) 등 미국 정치인들과 유명 정치 논객 글렌 벡(Glenn Beck)이 인터뷰에서 취하는 제스처를 차용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정치인이 신체를 활용한 감정적 선동을 통해 어떻게 전략적 ‘진실성’을 확보해 나가는지 은유한다.
<The Digital Face>(2012) 또한 정치인들의 제스처를 빌려온다. 특히 미국 대통령이 정기적으로 의회에서 행하는 국정보고인 일반 교서(State of the Union Address)에 주목했다. 1990년 부시 대통령과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병치해 정치인들의 퍼포먼스 진화를 확인한다. <In Camera>(2012)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언론 미디어의 전략과 작동 방식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사르트르의 단편 희곡 「닫힌방」(1943)을 모티프로, 3명의 배우가 각각 뉴스 속 앵커, 리포터, 시청자로 분한다. 3자 위성 중계를 통해 동시에 녹화된 작품은 통신이 지연되며 발생하는 기술적 소통의 실패를 보여주며, 최근 뉴스 미디어와 그들이 보도하는 사건, 시청자 사이의 어긋나는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최근 미디어의 다변화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지식인,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가 직접 등장해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설파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플랫폼을 만들어내고 있다. 레이저는 특히 TED 강연에 주목해 <The Thought Leader>(2015)를 발표한다. 작품은 TED의 녹화 및 편집 기술을 완벽히 흉내내며, 10살짜리 소년 배우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각색한 대사를 말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특화된 미디어 플랫폼의 형식을 전유해, 지난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비판을 겹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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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Mine)> 싱글채널 비디오 22분 2009
레이저의 작품 제작 과정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특징은항상 각종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작품에서 안무가, 무용가, 치료사 등과 협업해 퍼포먼스를 구성했고, 이번 전시 출품작 <Mine>의 경우 수술용 로봇 전문가를 참여시켰다. 가방을 찢고 침투한 로봇이 립글로스, 지폐 등 가방 안 소지품을 어지럽히며 캐내는(mine) 장면을 통해 동시대 미디어의 감시와 사생활 침해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Handle/Poignee>는 2명의 운동 치료사, 전문 무용수 그룹과 함께 구성한 퍼포먼스를 촬영했다. 미디어의 영향 아래 진보와 보수로 양분된 정치 성향을 갖게 된 현대인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안무는 ‘훈육하는 부모/타이르는 부모’, ‘순종적인 아이/반항적인 아이’ 등 4가지 원형으로 구분된다. 각 유형을 벤 다이어그램화한 형상의 무대 위에서, 예컨대 훈육하는 부모의 안무는 다분히 경직되고 강박적인 동작으로 이어진다면, 반항하는 아이는 통제 불능의 몸부림에 가까운 몸짓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아이를 다루는(handle) 부모와 세계를 조정하는 정치인의 행위를 중첩시키며 쉽사리 옳고 그름을 단정내리기가 불가능한 현실을 일깨운다.
레이저의 가장 최근작 <In Real Life>(2019)는 온라인 플랫폼에 의존하는 프리랜서 노동자 5인에 대한 리얼리티 쇼를 표방한다. 소위 ‘긱 경제(Gig economy)’라 불리는 프리랜서와 수요자들을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과 그곳을 기반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주체들이 특정 미션을 수행하며 그들 스스로 감수해야하는 불안정성과 위험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이 또 다른 프리랜서 심리 치료사와 온라인으로 상담하며,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추고 부담감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가볍게 풀어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개인과 개인을 연결해 새로운 공생 관계를 창출할 것이라 기대되었던 대안적 미디어 플랫폼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해체한다. 오히려 플랫폼을 소유한 자본만이 끊임없이 증식하고, 내부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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