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의 세상여행
오랜 시간에 걸쳐 집 주변 풍경을 그리는 찰스 리치. 그의 한국 첫 개인전이 제이슨함갤러리에서 열렸다. 다양한 매체를 실험한 초기작부터 존재론적 성찰을 담아낸 최근작까지 총망라했다. 꿈과 현실의 만남, 외부 세계와 내밀한 자아의 조우를 안팎의 풍경이 중첩된 이미지로 구현했다. 그가 집이라는 한 장소에서 남긴 시공간의 자취를 따라가본다.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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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 with Snow> 종이에 수채, 흑연 10.5×15.2cm 2013-17
손바닥만큼 작은 그림에 눈 내린 밤 풍경이 그려져 있다. 흐릿한 나무 기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행성처럼 매달린 알록달록한 전등과 네모난 별자리표가 희미하게 겹친다. 자연을 그린 풍경화라기엔 어딘가 이질적이다. 오두막집과 나무에 눈을 두면 고즈넉한 마을의 형상이 나타나고, 희미한 소품을 인지하면 이내 집 안 풍경이 떠오른다. 찰스 리치(Charles Ritchie)가 무려 4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 <Reflection with Snow>(2013~17)는 유리창 너머의 설경과 유리창에 반사된 실내를 그대로 담는다. 그는 1954년 켄터키에서 태어나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 워싱턴국립미술관의 미국 현대판화 ·드로잉 부서 협력 큐레이터로 35년간 재직했다. 현재 미국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거주하는 작가는 도시 외곽에 있는 집 주변의 풍경 또는 실내에서 유리창으로 본 정경을 20cm 내로 잘게 찢은 스케치북에 그리며, 집이라는 “한 장소에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깊게 관찰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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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with Lamps and Open Journal> 종이에 수채, 과슈, 흑연 12.7×9.8cm 2019-20
리치가 제이슨함갤러리에서 한국 첫 개인전 <Welcome to Suburbia>(3. 12~4. 28)를 열고 관객을 전시장으로,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198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약 35년간 제작한 드로잉 27점을 소개한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작업을 포괄하는 키워드로 세 가지를 꼽았다. “‘내부(interior)’, ‘외부(exterior)’, ‘반영(reflection)’이 잘 드러나고, 다양한 규격과 포맷, 각기 다른 매체, 흑백과 채색 드로잉”을 골고루 선보일 수 있도록 신경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길게는 수년에 걸친 호흡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는 2개 이상의 드로잉을 번갈아가며 작업하거나 오래 전에 그려둔 드로잉에 색채를 가감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자신이 기거하는 집 안 풍경, 그리고 그 경계 밖에 있는 자연 풍경을 창문가에 포개면서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시각화한다. 그가 살아온 자취가 녹아 있는 아주 작은 크기의 그림에서, 우리는 작가가 어디를 어떻게 여행해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찰스 리치의 작품 세계는 초창기 재료 실험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에 제작한 <Gibbous Moon>(1984), <Reflection with Rocking Chair and Pillow>(1985), <Rocking Chair in Sunlight>(1988~89)는 각각 펜과 잉크로 그린 담채화, 얇은 흑연과 옅은 농도의 물감을 활용한 수채화이다. 작가에게 수채 물감, 흑연, 잉크, 과슈, 크레용, 목탄, 먹, 사포, 지우개 등 다양한 재료는 때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날씨와 계절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재료에 광범위한 흥미를 가지며 명도의 스펙트럼을 탐구한 작가는 1990년대부터 재료들을 통합하기 시작한다. 노란색 수채 물감을 베이스로 콩테, 흑연, 석판용 크레용 등을 혼합해 그린 <Late Sun>(1990~96), 목탄과 흑연으로 명암을 가하고 사포로 긁어내 빛의 세기를 조절한 <May>(1996~2011)와 <September>(1999~2011)가 그 예이다. 특히 <May>는 작가가 원한 흐릿함의 정도에 달하기까지 수차례 쌓고 지우기를 약 15년간 반복해 완성한 드로잉이다. 이외에도 매사추세츠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판화가 짐 스트라우드(Jim Stroud)와의 협업으로 메조틴트, 애쿼틴트, 에칭 기법을 활용한 판화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에게 판화는 자신의 ‘손맛’과 외부의 우연한 효과를 조화시키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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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Map with Five Drawings I> 종이에 수채, 흑연 10.8×15.2cm 2012-17
미술 재료의 물성을 파악하고 매체를 확장해온 작가는 2000년대 이후 삶에 대한 성찰에 몰두한다. 드로잉에 세밀한 래피도그래프 펜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빼곡히 적어내려가거나, 아내 버지니아의 도움으로 1977년부터 그려온 일기장 그림을 책으로 엮었다. 사사로운 드로잉에 내밀한 음성을 얹고, 새벽 세 시 반에 기상해 지난밤 꿈을 밑그림 없이 단숨에 그리는 행위는 내면으로의 침잠을 암시한다. 이러한 리치의 작업 세계는 <Studio Reflection>(2014~17)과 <Self-Portrait with Lamps and Open Journal>(2019~20)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투명한 유리창에 어둑어둑한 마을 풍경과 작가 자신, 그가 썼던 일기장과 수많은 미술 도구들, 공중에 붕 떠 있는 작은 전등이 중첩된다. 바깥 풍경과 사적인 공간이 조우하는 창문이라는 경계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삶을 반추하는 작가의 태도를 은유하는 평면이다. 작품명에 ‘자화상(self-portrait)’이라는 단어가 추가된 것도 이 시기 즈음. “일기장 그림은 잠재의식의 충동적인 돌출이며, 다양한 기법으로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드로잉은 시공간을 농축한 명상적 화면”. “삶이라는 미스터리에 가능한 깊게 침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은 그는 외부 세계와 자아, 현실과 꿈이 맞닥뜨리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올해 리치는 다양한 재료가 자아내는 예상치 못한 패턴을 연구하기 위해 다시 매체 실험에 전념 중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들과 그 결합, 예를 들어 복잡한 크로스해칭 드로잉을 펜과 잉크로 재발견하거나, 과슈와 수채 물감을 동시에 썼을 때 어떠한 효과가 나타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집이라는 한 장소에서 시공간을 오롯이 축적하고, 간헐적으로 쏟아내는 꿈에 대한 단상을 더욱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 유효한 수단일 것이다. “나는 내 일기와 꿈, 이미지들을 통해 자아 발견의 여정을 지속할 것”이라 단언하는 작가. 그는 현재 뉴욕 소재 브라빈리에서 진행할 개인전을 위해 작업 중이며, 돌아오는 6월 아트브뤼셀에 참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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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리치 / 1954년 켄터키 출생. 조지아대학교 및 카네기멜론대학교 졸업. 워싱턴국립미술관에서 35년간 협력 큐레이터로 재직. 필라델피아 갤러리조(2020), 뉴욕 브라빈리프로그램즈(2017) 등에서 개인전 개최. 마드리드 에스파시오아트쿤스트아르테(2019), 더블린 갤러거갤러리(2018) 등의 단체전 참여. 볼티모어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워싱턴국립미술관 등에서 작품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