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자연, 생동하는 삶
빌리 차일디쉬는 미술사의 익숙한 장르와 기법을 차용해 감흥을 표출한다. ‘스터키즘’을 공동 창시한 ‘급진적 전통주의자’. 그가 리만머핀 서울에서 개인전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4. 23~6. 27)을 열었다. 자연에 대한 근래의 관심을 반영한 회화작품 7점을 공개했다. 그에게 전통과 자연은 고루한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삶과 진정한 자유를 안내하는 통로이다.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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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s and sky> 리넨에 유채, 차콜 183×213.5cm 2019
어슴푸레 해가 지고 늑대가 배회하기 시작한다. 늑대는 자작나무 숲을 어슬렁거리기도, 꽃이 돋아난 나무 사이를 살그머니 다니기도 한다. 그를 따라 걸으면 일렁이는 하늘이 펼쳐진
호수에 도착한다. 이곳으로 우리를 끌고 온 늑대는 살의를 품은 맹수라기보다 관객을 작품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에 가깝다. “이 늑대들은 나의 일부”라는 빌리 차일디쉬(Billy Childish). 그의 개인전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Wolves, sunsets, and the self)>(4. 23~6. 27)이 리만머핀 서울에서 개최됐다.
작가는 영국 켄트주 휘스터블에 거주하며 그곳의 풍경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제작한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성공이나 깨달음을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지만, 예술은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이 전부다. 예술은 우리가 따르는 정신적인 여행이다.” 그에게 예술은 고상한 지적 활동이나 과거의 미술사를 격파하며 발전해 나가는 포탄이 아니라, 생동하는 삶을 느끼도록 돕는 감각의 증폭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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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 in birch trees> 리넨에 유채, 차콜 183×183cm 2019
1959년 영국 채텀 출생의 차일디쉬는 중등 교육를 마치지 않은 채 조선소 견습공으로 일하며 드로잉을 꾸준히 그려냈다. 이 드로잉으로 1978년 런던 세인트마틴대학교에 입학하지만, 1981년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당했다. 그럼에도 화가, 소설가, 시인,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예술을 종횡해왔다. 그는 미술에 있어 일관되게 구상 회화를 지지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스트모던적인 스펙터클과 개념주의를 발판 삼아 영국 YBAs(Young British Artists)가 글로벌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했다. 차일디쉬의 전 연인이자 YBAs의 대표 작가인 트레이시 에민은 구상 회화만을 지속하는 그에게 “당신의 그림은 꽉 막혔어, 당신도 꽉 막혔어!(Your paintings are stuck, you are stuck!)”라 소리치기도. 이에 차일디쉬는 1999년 동료 찰슨 톰슨과 함께 구상 회화의 복권과 전통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자아도취적인’ YBAs의 창작 문법에 반대하는 ‘스터키즘(Stuckism)’을 창시했다. 이들은 영국 미술계를 조소적으로 꼬집는 선언문 ‘The Stuckists’를 작성해 아마추어의 미술계 진입을 주장하거나, 회화를 제외한 다른 미술 장르를 부정하는 등의 강령을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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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zen lake>, 리넨에 유채, 차콜 152.5x213.5cm 2017
1년 후 차일디쉬는 특정한 ‘사조’로 포섭되기를 거부하며 스터키즘을 떠나지만 여전히 ‘구상 회화’와 ‘전통적인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작가는 반 고흐와 뭉크를 돌아가야 할 ‘전통’이라 여기는데, 이는 그들이 명확한 계열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배경과 짧은 붓터치, 보색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Irises>(2020)의 제재와 표현 모두에서 고흐의 영향이 묻어난다. 낮은 채도에 선이 꿈틀거리는 <Midnight sun / frozen lake>(2017), <Trees and sky>(2019)는 뭉크를 연상시킨다. 차일디쉬는 이들로부터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흥을 화면에 불어넣기 위해 전통적인 기법을 적극 차용하길 권한다.
한편 차일디쉬는 리넨이 드러날 정도로 화면에 물감을 얇게 칠하는데, 이는 그의 작업 방식에 기인한다. 리넨에 목탄으로 스케치한 뒤 바로 채색해 순식간에 그려내는 작업은 4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사후 수정을 가하지 않는 작가는 그림에서 손을 떼는 순간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 말한다. “사람들에게 특정한 느낌을 강요하지 않도록 작품 제목을 최대한 평범하게 짓는다. 그럼으로써 관람자가 작품 속으로 푹 빠질 수 있게 한다. 나는 작품 밖으로 빠져 나와 회화가 스스로 완성되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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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ysanthemums in June’s pot> 리넨에 유채, 차콜 112x91cm 2017
차일디쉬의 작품에는 테두리가 늘 새로 그어진다. 이 역시 작품의 일부라는 그는 캔버스 크기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심리를 반영했다고 전한다. 주어진 틀을 거부하고 그림의 시작과 끝 지점을 직접 설정하는 태도. 누군가에게 이는 강박적으로 ‘꽉 막힌’ 모습일 수 있지만, 자신이 짠 네모난 ‘링’ 위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일이기도 하다. 올해 그는 다방면에서의 활동을 이어갈 계획. 4장의 LP는 늦여름에 발매되며 연말에는 베를린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어떤 예술 장르든 “근본 원리(basic ground)”를 가장 중시하는 그는 기초적인 색과 면, 단어와 소리에서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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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차일디쉬 프로필
빌리 차일디쉬 / 1959년 영국 켄트주 채텀 출생. 1978년 런던 세인트마틴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81년 퇴학. 리만머핀 뉴욕(2020), 영국 마게이트 칼프리드만(2019), 베를린 노이게림슈나이더(2018) 등에서 개인전 개최. 푸시킨하우스(2014), 독일 노이에아케너쿤스트베레인
(2014) 등 단체전 참여. 현재까지 소설 5권, 시 40편 집필. 150장 이상 LP 녹음. 현재 영국 휘스터블에 거주하며 작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