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는 흐르고
2020 / 05 / 17
신진 작가 기획전 <코쿤>(과천 스페이스K)이 올해로 9회를 맞았다. 작가 4명의 작품 총 22점을 선보였다. / 김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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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석 <부품들의 정렬> 캔버스에 유채 227.3×181.8cm 2020
스물아홉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지켜보다 문득 문장을 써내려 가고 싶어진다. 어떤 외국인 선수가 힘차게 2루타를 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연극과를 졸업했지만 글을 쓰는 데는 소질이 없다고 여겼으며 재즈 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녘 부엌의 테이블에서 문장 덩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허망하고 불안한 청춘의 조각을 일상에서 조금씩 떼어다가 경쾌하고 호흡이 짧은 이야기를 적어냈다. 그렇게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완성한 하루키는 ‘군조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가로 등단한다.
지난 4월, 과천 스페이스K에서 <코쿤2020:스쳐 지나간다>(4. 2~5. 15)가 열렸다. 해마다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기획전 <코쿤>이 올해로 9회를 맞았다. 한자리에 모인 4명의 작가 이소, 이재석, 이창운, 임희재는 특정한 주제나 매체로 묶이진 않지만, 첫 소설을 쓰던 하루키와 그의 글을 닮았다. 소설의 한 구절처럼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고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지만, 네 작가는 동시대를 흐르는 감각에 집중하고 저마다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구현되는 시각매체는 빠르게 지나치는 시간을 다채롭게 기억하며 흔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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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운 <편도여행> 혼합매체 가변크기 2020
신비롭고 상서로운 존재인 ‘용’을 이상향의 메타포로 삼는 이소는 용의 형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환한다. 회화 표면을 여러 번 겹쳐 쌓아올리거나, 두터운 화면을 긁어내고 반짝이는 피그먼트를 뿌린다. 텍스트와 함께 가볍게 드로잉하거나 부드러운 색채의 세라믹으로 조각하기도 한다. 웅크려 있는 상상 속 동물은 평온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작가 자신을 포함한 관객에게 편안함과 행복을 건넨다. 임희재는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나 박물관에 박제된 동물의 이미지에 집중한다. 인간이 설정한 틀로 왜곡돼 다시 인간에게 전달되는 폭력의 순간이다. 작가는 맹수가 먹이를 덮치는 극적인 순간을 역동적인 필치로 드러내거나 박제된 동물이 담긴 유리 벽을 화면 전면에 내세우며, 가공된 진실과 그 이면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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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재 <무제> 캔버스에 유채 162.2×260.6cm 2020
이재석은 군 복무 기간에 뼈가 부러져 수술했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일정한 규칙으로 질서정연했을 유기적 신체 일부가 틀어지며 통증을 느꼈던 작가는 세상을 구성하는 빼곡한 원칙과 구조를 상기한다. 군대라는 계급 조직의 상황이 더해져 관심이 확장됐고, 그 안에 존재하는 개인의 역할과 기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자연 혹은 기하학적 패턴을 배경으로 물체나 신체를 분해해 나열하고 원색의 색채를 캔버스 앞뒤로 입힌다. 경직된 듯 자유로운 화면 위로 교묘한 분위기가 맴돌며 배치된 형태를 부각한다. 두어 개의 정해진 길을 따라 공이 끊임없이 구르는 이창운의 <편도여행>은 전시 공간 너머 (주)코오롱그룹 사옥 1층의 로비 천장에 설치됐다. 모터와 스피드 컨트롤러로 제어되는 약 15개의 스테인리스 공은 컨베이어 벨트를 탄 조립품처럼 계속 같은 방향으로 구르며 획일적이고 반복적인 사회의 시스템과 그 안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암시한다. 이동하는 공이 발생시키는 규칙적인 리듬은 일견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공중에서 아슬아슬하게 운동을 이어가는 상황이 묘한 불안감을 형성한다. 공은 예기치 않게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며 공간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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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 <둘 사이> 캔버스에 유채, 피그먼트 227.3×181.3cm 2020
전시는 어지러운 현실에서도 특정한 현상을 포착해 작업을 전개하는 네 신진 작가의 번뜩이는 시선과 가능성을 조명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첫 문장처럼, 세상엔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듯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과 별다를 것 없는 창작의 과정을 지날 뿐이다. 한 분야의 거장도 그렇게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전시 제목이 함축하듯, 지난한 여정을 거치는 모두를 소소하게 위로하며 내일의 미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