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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테라피?제니홀저테라피!

2021/02/14

국제갤러리 9년 만의 개인전, 문자로 어루만지는 상처 / 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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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ionfromTruisms:THEMOSTPROFOUNDTHINGSARE INEXPRESSIBLE> 소달라이트블루벤치43.2×63.5×40.6cm(부분)2015

‘용감한!’이라는 형용사에 꼭 맞는 작가 제니 홀저(Jenny Holzer). 예술로 세상을 구원하고 대중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은 예술가는 많지만 그 판타지를 제니 홀저만큼 진짜 실행한 이가 있을까?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 욕망으로부터 나를 보호해라)”. 1987년 제니 홀저의 문장으로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이 환하게 물들었다. 그가 현재까지 가장 아끼는 기념비적 문구다. 욕망과 사치의 상징인 옥외 광고 전광판이 공공미술의 장으로 탈바꿈한 순간이다. 세기가 한 번 바뀌었지만 도시, 건물, 자동차, 스니커즈 등 사회적 의미의 여백이 존재하는 곳 어디든 그의 경구가 울려 퍼진다. 
40여 년 동안 정치, 역사, 개인에 경종을 울린 텍스트로 동시대에 의미심장한 촌철살인을 날려온 제니 홀저. 그가 오늘날의 불의를 고발하는 신작을 가득 들고 개인전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2020. 12. 10~1. 31 국제갤러리)를 열었다. 전시는 최초 공개되는 수채화 연작 36점, 검열 회화 신작, 대리석 벤치 그리고 대표작 LED 전광판 설치작품으로 꾸려졌다. 작가의 무거운 주제 의식을 함축하는 전시 제목은 지독한 현실, 지루한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긍정의 시선이다. 전시는 두 파트다. 자연광 아래 수채화 연작이 벽을 가득 채운 K2 공간과 LED 전광판이 바삐 흘러내리는 K3 공간. 검열 회화와 경구가 새겨진 대리석 벤치는 두 전시장 사이사이를 차지해 긴장의 끈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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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홀저개인전<생생한공상을하며사는것이중요하다>전경

그간 제니 홀저는 1970년 이후 회화 작업을 하지 않았지만, 2016년 대선 당시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 당선을 도왔다는 특검팀의 수사 보고서 「뮬러 보고서」를 접하며 다시 이젤 앞으로 돌아왔다. “수채화 작업들은 지저분하고 극단적이며 분노하거나 슬퍼합니다. 트럼프는 대단히 엉망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채화는 무해합니다.” 「뮬러 보고서」의 좌절, 분노, 원통함의 정서를 재료의 부드러움과 낭만으로 슥슥 눌러 담았다. 
마치 커피를 엎어 내용을 숨기려 한 기밀문서 같은 수채화 연작 <Dirt on HILLARY CLINTON(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추문)>(2020), <Ultimate Sin(궁극의 죄악)>(2020), <At TRUMP TOWER (트럼프 타워에서)>(2020)는 보고서 자체에서 찾았거나 우연히 발견된 내용을 소재 삼은 작업이다. 
제니 홀저의 검열 회화 연작은 반짝거리는 겉모습에 정치적 의미를 숨겨뒀다. 작가의 손을 거쳐 추상화로 번안된 문서는 정권에 위해를 가할 만한 부분은 모두 삭제된 ‘공개 보고서’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작업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예술의 역할을 다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사건의 충격을 가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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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홀저개인전<생생한공상을하며사는것이중요하다>전경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매체로 선택했다는 제니 홀저. 그래서인지 그의 문장은 통쾌함을 넘어 아찔하기까지 하다. 전시에 출품된 4점의 LED 전광판 중 국제갤러리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신작 <TRUISMS (경구들)>(2020)에서 그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대문자로만 이루어진 영문 문장과 “ 가장 심오한 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 “자기 혼란은 정직함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같이 어색한 한국어 문장이 번갈아 나온다. 명언과 막말 사이를 오가는 텍스트와 공간을 메우는 불규칙한 기계음은 무의식의 세계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착석할 수 없는 대리석 벤치 상판에 새겨진 문장도 귓전을 때린다. 가히 현대인의 명상록이다. 관객은 흐릿하게 쓰인 <SOLITUDE IS ENRICHING(고독은 풍요롭게 한다)>(2019), <IT IS IN YOUR SELF-INTEREST TO FIND A WAY TO BE VERY TENDER(매우 상냥해지려는 것은 당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다)>(2015)를 명상하듯 읽으며, 현대 사회의 고립된 개인과 화합의 기회를 직시한다.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에 최초의 여성 아티스트로 입성, 같은 해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명예와 권위를 누린 작가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했다. 자극적인 특종 소재나 낭만적인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지 않았기 때문. 그가 눈 돌리지 않고 응시한 세상은 작업에 떠다니는 텍스트처럼 소란했고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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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X>24k금,금박,리넨에유채157.5×203.2×3.8cm(부분)2016~20

“A MAN CAN'T KNOW WHAT IT'S LIKE TO BE A MOTHER(남자는 엄마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작가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구가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엄마의 삶은 변함없고, 여자의 삶이 스스로에 의해 쓰인 적 없으니깐. 그런 제니 홀저에게 나와 타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많이 변화했지만 여전히 백인 남성 위주의 미국 사회에서 아내, 엄마이자 여성 아티스트는 약자이기에! 그래서 제니 홀저는 아직도 할 말,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이다. 
‘분노 요법’은 작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올해 71살을 맞아 고희가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작업은 오늘을 존엄히 살아가는 이들을 끌어안는다. 삶이 원래 희극과 비극의 경계에 있듯, 제니 홀저의 작업은 위트와 위험 사이를 줄타기한다. 
제니 홀저는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로 지독했던 2020년을 향한 송가를 보냈다. 새로운 해, 작가의 캘린더는 흥미로운 상상으로 꽉 찼다. 트럼프가 남긴 최악의 트윗 200여 개를 모아 <CURSE TABLETS(저주 태블릿)>를 완성해야 하고,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과 바젤미술관과의 협업도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펜데믹 이후 예술가의 역할을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질문의 의미를 곧추세웠다. “예술가는 스스로 적합한 방식에 따라 놀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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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홀저/ 1950년미국오하이오출생.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석사졸업.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2019),국립현대미술관(2019),영국테이트모던(2019),영국블레넘궁전(2017)등에서개인전개최.<TEXT>(아이슬란드국립미술관2016),<ByeByeAmericanPie>(부에노스아이레스라틴아메리카미술관2012)등의단체전참여.베니스비엔날레황금사자상(1990),세계경제포럼크리스탈상(1996)수상.현재뉴욕을중심으로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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