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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적프레스!헛헛한말과얼굴

박연주와 정희승의 협업 출판 프로젝트 / 안 소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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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적프레스<헛수고>포스터

허공에 던져진 물감이 글자에 부딪혀 잠시 파열하다 그대로 굳었다. 내뱉은 체액처럼, 하찮은 형태가 제 옅은 채도와도 무방하게 진부한 읽기를 교란한다. 고딕의 엄격함은 애매하게 벌어진 글자 사이의 빈 공백 탓인가, 신비를 잃었다. 늘어난 테이프처럼 제 호흡을 망각한 어리석음의 통제 불가능을 명백히 보여준다. 소리, 분명 어디에도 음은 없었지만 가사 없이 부르는 노래처럼, 혹은 에르네스토와 아이들이 어머니의 “노래 속에 드문드문 흩어진” 노랫말을 듣는 것처럼1), 아주 낮은 읊조림이 내내 거기 있었다. 이 망가진 색과 글과 말과 모든 것의 침묵을 흐릿한 배경 삼아, 더욱 또렷해진 새의 머리.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온전함이 나태함을 뚫고 시선의 고리를 만든다. 사진이니까 가능한 허깨비같이 의문스러운 시점, 형태의 무게 중심처럼 둔갑시켜, 본 것에 대한 신뢰를 강요하거나 간혹 뒤흔든다.
헤적프레스의 <헛수고>(2020. 12. 15~1. 10 팩토리2)는 정희승의 사진과 박연주의 타이포그래피가 하나씩 쌍을 이루어 공간에 나열돼 있으며, 타이포그래피의 형태를 좇아 제 속도와 방향을 만들어 읊조리는 장기하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파열된 물감 자국은 의미 없이 혹은 의미심장하게 내던져진 작은 얼룩으로, 박연주의 타이포그래피 일부를 미미하게 훼손시켰다. 조정과 개입과 훼손이 교차하는 전시의 내막에는 ‘헛수고’로 일축해버린 지식과 정보들이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길 잃은 대화 속에서 가공돼 다시 한시적으로 제 속내를 드러내고야 마는 헛웃음을 그려낸다. 예컨대, 정희승은 위키피디아에서 수집한 각종 새의 사진 정보를 다시 촬영하고 편집하고 확대하는 등의 보정을 했다. 매우 선명한 새 머리 사진 열두 장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보기와 읽기 상황에 관여했다. 박연주는 정희승이 '새-새 머리-새에 관한 진부한 우화'에서 연쇄적으로 연상한 어리석음에 관한 교훈과 진부함의 오류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층위에 열두 개의 짧은 신문 기사를 발췌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배열함으로써 일련의 상황을 더 보탰다. 여기에, 뮤지션 장기하의 목소리는 박연주가 발췌하여 가공한 텍스트를 자기 방식으로 조그맣게 소리 내 읽으면서 녹음한 것으로 정황상 짹짹, 꽥꽥, 지지배배 하는 새소리마냥 공간에 또 다른 파열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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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돌릴때까지>사진,타이포그래피60×48cm2020

사실, 박연주가 발췌해놓은 신문 기사에 대한 읽기의 가능성에 연신 헛발질로 맞서는 저 목소리의 난처함을 모른 척 등 뒤에 두더라도, 선명하고 다소 크게 사진에 담긴 새의 화려한 머리와 과장된 타이포그래피의 실효성은,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소소한 의혹들을 먼 데서 계속해 불러온다. 
<아무도 보도 안 해>(2020)는 정희승이 제작한 펭귄의 측면 사진과 박연주의 텍스트가 규칙대로 짝을 이룬다. 박연주가 인용한 기사 내용은 이렇다.
S 신문은 「트럼프의 불만… “노벨상 후보 올랐지만 아무도 보도 안 해”」라는 기사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이 노벨상 후보에 오른 것을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출했다.”고 보도했다.
부조리한 블랙 유머 같기도, 흔한 수법처럼 사회·정치 풍자의 뉘앙스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헌데, 헤적프레스의 <헛수고>를 관통하는 두 작가의 태도가 공허하고 쓸모없는 행위와 체계를 다시 반복하며 지탱하고 있는 각자의 예술 노동과 이로부터 발생한 참을 수 없는 의혹,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사이를 왕복하지 않는가.
마침, 이 전시는 잠시 시기가 겹쳤던 정희승의 또 다른 전시에 출품된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2020)과 희미한 대구를 이룬다. 새 머리 대신 예술가의 초상을 놓고 부조리한 텍스트 대신 부조리한 삶의 서사와 봉인된 말소리의 흔적을 나열해, 불가능과 불가결한 한계를 가로지르는 사이렌의 절정을 지연시키는 예술적 삶의 열망에 대한 순수한 의혹을 떠오르게 한다.

1)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te Duras)의 소설『여름비(La Pluie D’été)』(Éditions P.O.L, 1990)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과 모국어를 잃어버린 이방인 어머니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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