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소통하는 ‘예술 공유지’
2021 / 02 / 15
미술비평가 정현, 위상공간로싸이트 론칭하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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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출품작
“우린 너무 달라!” 옛 연인과 이별할 적, 비수로 날아와 가슴에 꽂혔거나 냉혹히 내뱉었을 한마디. 그렇다고 이별을 맞은 누구 하나 틀려먹은 인간이란 말이 아니다. 성격이, 취향이, 습관이 달랐던 두 사람이가장 가까운 사이가 됐다가 다름의 격차를 끝내 좁히지 못했을 뿐. 우린 비단 연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장애인도 조금 더 다른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조금 더’를 극복하고 관계 맺기란 녹록지 않다. ‘잇자잇자 사회적협동조합(이하 잇자잇자)’ 대표이사 정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술이야말로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공유지”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이름은 미술평론가, 대학교수로 더욱 익숙하다. “나는 장애인미술을 미술현장의 일부로 관심 있게 지켜봐왔다. 지난 2013년, 장애인미술의 확장을 꾀하던 비영리단체 ‘로사이드 (Rawside)’와의 인터뷰가 첫 계기였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잇자잇자는 로사이드의 후신이다. 정현은 로사이드와 인연을 이어오다 2018년에 잇자잇자의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그간 로사이드는 약간의 내홍을 겪었다. 함께 활동하던 많은 동료가 떠났고, 로사이드를 이끌던 고재필디렉터만이 남았다. 로사이드의 역사와 의미가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선뜻 나섰다.” 자신은 여전히 ‘바지 사장’에 불과하다는 정현. 그는 잇자잇자 대표이사로, 장애인미술 연구자로, 기획자로, 활동가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장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쇼핑 리스트도 장애학 관련 도서로 빽빽하다.
홍제동 골목 어귀의 위상공간로싸이트는 로사이드 시절 공동 창작 스튜디오로 운영되던 곳이다. “작년 3월부터 조합원과 동료 작가가 함께 전시 공간으로 리뉴얼했다. 정비 공사 총괄은 이의성 작가가 도맡았다. 사실 내 제자다. 다이소와 당근마켓도 큰 도움이 됐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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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공간로싸이트 외부 전경
‘위상공간’이란 수학에서 ‘열린 집합’을 뜻하는 단어다. 이 집합은 위치만을 가질 뿐 위계나 질서가 없다. 그래서 수학적으로 이웃 개념도 갖는다. 예술로 비장애와 장애를 ‘잇는’ 공간의 정체성과도 찰떡궁합이다. 로싸이트는 ‘날 것(raw)의 창작’을 표방했던 로사이드의 과거를 존중하고 명맥을 이어갈 장소(site)라는 뜻을 품는다. 로사이드를 두 번 겹쳐 적으면 로싸이트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관전 <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2020. 12. 23~1. 22)는 로사이드에서 로싸이트로, 비영리단체에서 사회적협동 조합으로의 전환을 세상에 알리는 전시다. “처음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장애인, 비장애인 작가가 함께 트리를 꾸미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매사를 정확한 루틴에 맞춰야 하는 장애인에게 코로나19는 더 높고 단단한 장벽이더라. 집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래서 로사이드의 아카이브를 전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정현은 두서없이 쌓여 있던 아카이브를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굴해낸 자료집, 전시 도록, 굿즈를 전시장 곳곳에 뒀다. 벽에는 여러 전시 포스터와 작품이 ‘캡션 없이’ 걸려 있다. “몇몇 작품은 작가와 연도를 알 수 없다. 심지어 한 작가의 작품인지, 공동 창작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점이 여기서 일어나 는 창작 활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 언뜻 낙서처럼 보이는 드로잉 작품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다름을 감각하는 이미지다.”
정진호 작가는 공룡의 학명을 줄줄이 외운다. 이를 일본 만화의 세계관과 연동해 새로운 괴수를 창조한다. 그것도 매일매일 수십 종을. 신승오 작가는 ‘밀리터리 덕후’다. 전쟁사에 상상을 덧입혀 가상의 ‘르와타느 공화국’ 건국사를 서술해냈다. 김동현 작가의 지도에는 시공을 넘나드는 기차가 오간다. 모두들 자신이 꽂힌 소재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린다. 정현도 이 작품을 대하며 그간 미술평론가로서 단련한 근육을 이완해야 했다. “우리의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그런데 이들은 같은 세계를 끊임없이 순환한다. 결코 지루한 시간도 아니다. 그들의 시공에 처음 다가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낯설다. 하지만 그 시공이 모든 예술이 포착하려 부단히 애써왔던 시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어떨까. 그곳에서 예술의 가장 순수한 원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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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 전 전경
로싸이트는 이미 한 차례 전시를 치른 바 있다. 지난해 8월, <피크닉>을 열고 총 4팀의 장애인과 비장애인 작가의 ‘협동 예술’을 선보였다. “협동 예술은 로사이드 시절 ‘공동 창작’의 형식을 계승, 확장한다. 창작에서 관계로 중심을 이동해보려는 시도다. 장애인의 세계를 탐험해 그 고유의 주체성을 찾아보려 한다.” 신제현은 장애인 작가 강동연의 컨디션과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 언어 너머에 있는 그만의 재현과 소통 방식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또 고재필 디렉터의 주도로 <발달장애인 협동예술현장 연구>도 진행했다. “장애인미술 관련 정책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긍정적이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나 필요를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협동 예술의 과정과 그 어려움, 의미를 직접 듣고 기록했다. 무엇보다 미래를 내다보려면 연구 활동은 필수다. 함께 일을 하면서 재필 씨의 새로운 능력을 찾았다. 그는 정말 탁월한 현장 연구자다!”
올해 로싸이트는 전시와 워크숍, 연구 활동을 병행한다. 정현은 이곳이 소규모 공간인 만큼 과부하가 걸리지 않게끔 탄력 있는 계획을 짜고 있다고. 전시가 없을 때는 쇼윈도가 광고판으로 변신한다. 장애인의 말, 장애를 사유하는 글귀를 내걸어 많은 이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장애인미술 연구소를 설립하는 게 장기 목표다. 학술과 현장을 연결하는 실천적 연구로 이 분야의 구조적 취약함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단순히 장애인 작가의 창작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장애인미술을 사회 운동과 연동해 장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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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 1968년 전주 출생. 파리1대학 박사 졸업. 인하대 조형예술학과 부교수. 공저로 『Art Cities of the Future: 21st century of Avant-Gardes』 (파이돈, 2013), 『큐레토리얼 담론 실천』(현실문화, 2014), 『이상뒤샹』(씨티알프린트, 2013) 등. 2018년부터 잇자잇자 사회적협동조합 대표이사를 맡아 <피크닉>, <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 (이상 위상공간로싸이트 2020)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