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은 검정이 아니다
2021 / 03 / 09
숯의 미술가 이배, 몬트리올 대규모 개인전 <Union> 개최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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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apping> 전경 2018 페로탕갤러리 파리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에게 숯은 일상적인 사물이다. 가볍게는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거나, 공기 정화용으로 실내에 장식한다. 숯의 정화 기능은 액운을 막는 상징과 주술의 차원으로 승화돼, 아기가 태어난 집 대문에 금줄과 함께 매달리기도 한다. 숯은 한자 문화권의 서예 전통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최초의 먹은 소나무 기름, 즉 송진을 태운 그을음을 아교와 섞어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먹이 시커먼 그을음을 고도로 정제해 만든 안료라면, 이 전혀 비범하지 않은 숯덩이를 창작의 재료이자 원천으로 활용하는 미술가가 있다. 약 30년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글로벌 작가로 활동 중인 이배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숯을 재료로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의 숯은 아시아 서예 문화권 고유의 물성과 정신성을 담고 있다. 작가 스스로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주목받았던 이유로 ‘숯, 그리고 숯에서 찾은 나의 정체성’을 꼽는다. 이런 그가 몬트리올 피파운데이션(Phi Foundation)에서 대규모 개인전 <Union>(2. 24~6. 2)을 열었다. 때맞춰 고양시 일산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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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한지에 숯 260×194cm 2019
독특하게도 이배의 일산 작업실은 아파트형 공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은 층고와 널찍한 공간은 100호가 거뜬히 넘는 그의 평면작품을 보관하기에 꽤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내 고향 청도 작업실에는 숯을 굽는 가마가 있다. 거기선 세심히 고른 소나무를 보름 동안 천천히 굽는다. 주로 청도에서 조각작업, 일산에서 평면작업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한국에 머무는 기간이 예상치 못하게 길어지고 있다고. 어쩔 수 없이 이번 몬트리올 개인전도 피파운데이션 관계자와 원격 소통으로 준비했다. “전시장에 가지 않고 전시를 준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까진 전시가 열리는 곳의 장소성을 염두에 두며 직접 작품을 설치했는데…. 정말 낯선 경험이었다. 마치 내가 작고 작가가 되어 회고전을 준비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이번 전시에는 약 20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모두 1989년 도불 이후 회화, 조각, 설치로 끊임없이 번안해왔던 숯 대표작이다. 최근 1~2년 사이 제작한 신작도 40점 이상 선보인다. 피파운데이션 건물의 네 개 층 전체를 활용해 전시를 꾸몄다. 총 7개 전시실을 차례로 지나는 동선은 마치 ‘숯의 숲’을 산책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첫 전시실에서는 이배의 대표 시리즈 <Issu du Feu>가 관객을 맞이한다. ‘불로 만든’이라는 뜻이다. 숯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명징하게 밝히는 제목이다. 시리즈 중 평면작품은 캔버스에 숯 조각을 갖다 붙이고, 그 표면을 평평하고 매끈하게 갈아냈다. 보는 위치에 따라 숯의 다채로운 나뭇결과 검은색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조각작품은 여러 숯 조각을 고무 밴드로 묶어 단단한 물성을 강조한다. 이것들이 전시장에 모여 하나의 군집을 이루면 거대한 고목으로 둘러싸인 숲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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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ch-37> 캔버스에 숯 218×291cm 2002
다음 전시실에는 동글동글한 숯 조각 한 무리가 벽에 매달려 있다. 과일나무에 결실을 맺은 영롱한 열매처럼 보인다. <무제>(1999)는 이배의 유년기 기억과 숯을 긴밀히 연결한 작품이다. <데생>(2000)은 실하게 잘 자랐거나, 땅에 떨어진 감의 다양한 모습을 숯검정으로 그렸다. “내 고향 청도에는 감나무가 지천에 널렸다. 그곳 하늘에는 수많은 새 떼가 날아다니고, 밤이면 알알이 박힌 별이 빛났다. 그 풍경, 그 순간을 숯으로 부활시켰다.” 영상작품 <달집태우기>(2014)는 나무 장작이 불타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월 대보름이면 치르던 풍속에서 영감을 얻었다. “어린 시절, 온 동네 사람이 다 함께 나무로 만든 움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었다. 그을음이 하늘에 닿아 영적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나의 작품에도 녹아 있다.”
또 다른 출품작 <붓질>(2020~)은 이배가 가장 최근에 시도한 신작이다. 숯가루와 미디엄을 섞어 직접 만든 물감을 수채화 종이에 획을 긋듯 그린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에서 한국 서예 전시 <선을 넘어서(Beyond Line)>를 봤다. 퇴계, 율곡, 정조, 세종, 석봉, 추사의 작품이 다 있는데, 그게 과거의 것으로 보이지 않더라. 이 선조들이 자신만의 필치를 거처 삼아 현존하고 있었다. 비로소 전통에서 동시대성을 찾은 느낌이었다.” <무제>(2019~) 시리즈는 한지를 일필휘지의 무대로 세웠다. 숯 조각의 그을음을 그대로 종이에 묻혔다. <풍경>(2002) 시리즈에서는 숯가루와 아크릴릭 물감을 섞었다. 화면의 두꺼운 물성이 빳빳하게 갈라진 나무껍질의 질감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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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 du Feu ch-66> 캔버스에 숯, 유채 260 70cm(부분) 2003
이배는 말한다. “우리는 숯이 단순히 검다고만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숯은 수백 가지의 검은색을 가지고 있다. 차갑거나 뜨거운 검은색, 잿빛의 검은색, 빛나는 검은색 등 수많은 뉘앙스가 있다. 검은색은 그저 색이 아니다. 깊이다.” 우주의 검은색도 마찬가지다. 아직 인간의 지식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무한한 시공의 깊이다. 또 이배와 숯의 검은색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사유해 존재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인간 내면의 심원한 검정이다. 숯은 다 타버려 산화했지만, 더 뜨겁고 강렬한 에너지를 품은 채 부활한다. 생과 사, 영원과 찰나, 진리와 피상 사이를 기억하는 궁극의 사물이다.
이번 전시 제목 ‘Union’도 숯의 양가적 성격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주어진 유한한 시간, 그 사이에 모든 이가 화합할 가능성이 있진 않을까? 검은색이 모든 빛을 흡수해서 검듯, 이배의 숯이, 숯의 검은색이 그 뜨거운 에너지로 모든 차이와 갈등을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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