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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것들을위한

2021/03/17

칠레 출신 세실리아 비쿠냐, 아시아 최초 개인전 개최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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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푸체소녀>닥종이에석판인쇄,수채,붉은실,대나무76.2×50.8cm1975~2021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산티아고에···”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 국영 라디오는 맑게 갠 가을 하늘에 빗나간 일기 예보를 반복 송출한다. 이 ‘오보’는 칠레 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세계 최초로 합법 선출된 사회주의 정권 살바도르 아옌데를 축출하고 군부 쿠데타를 알리는 신호이자 암호였다. 이후 피노체트는 17년간의 살벌한 ‘피의 독재’로 좌익 계열의 노동조합원, 학생, 예술가 등을 고문, 감금, 살해한다. 칠레인에게 집단 트라우마가 된 끔찍한 사건이자 기나긴 압제. 칠레 쿠데타를 살갗으로 느낀 산티아고 출신 세실리아 비쿠냐(Cecilia Vicuña)는 아시아 최초 개인전 <키푸 기록(Quipu Girok/Knot Record)>(2. 18~4. 24 리만머핀 서울)을 열어, 폭력의 상흔을 씻어내고 지구와의 공생을 꿈꾸고 있다. 시각예술가일뿐만 아니라 시인, 영화감독, 운동가로서 다방면의 활동을 펼치는 작가. 이번 전시에서 비쿠냐는 회화, 오브제, 설치, 영상 등의 작품 16점으로 세상의 ‘작은 것들’을 위해 노래하고 있다.
전시명이자 동명의 대형 설치작품인 <키푸 기록>(2021)은 고대 안데스어 ‘키푸’와 한국어 ‘기록’을 합성한 신조어. 본래 키푸는 고대 안데스 지역에서 문자 언어 대신 줄의 매듭으로 조세, 징집 등을 알린 비문자 의사소통 체계인데, 작가는 1970년대부터 기다란 키푸를 칠레 토착 문화와 현재를 잇는 원형의 ‘탯줄’로 활용해왔다. <키푸 기록>은 <키푸> 시리즈를 ‘한국 전시 전용’으로 제작한 신작. 기존 <키푸> 작업에선 두꺼운 염색 양모를 늘어뜨렸다면, <키푸  기록>에서는 한복 비단을 천장에 매달아 새로운 조형을 선보였다. 그 위에 <키푸> 시리즈 최초로 드로잉을 가했다. 이 드로잉은 추상적인 형태의 고대 남미 상형 문자에서 영감을 받은 1970년대 회화작업 <태양> 시리즈의 일부다. 비쿠냐는 한국 전통을 상징하는 한복에 자신의 ‘고대 언어’를 적어내며, 서구 기준으로 세계가 재편되기 이전의 태곳적문명을 조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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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프가있는자화상>캔버스에유채101.6×76.2cm2021

비쿠냐의 작업은 하늘하늘 곱게 걸린 겉모습과 달리 ‘정치적’이다.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어 광장에 엿을 날리거나 따끔한 경구로 관객의 정신머리에 회초리를 휘두르진 않지만, 지배 권력에 맞선 대항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어딘가 비틀린 현실을 서정적 조형, 우아한 말씨로 일깨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10점의 <프레카리오스> 시리즈가 담백한 투쟁의 대표작. 작가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깃털, 돌, 목재, 조개껍질, 헝겊, 플라스틱 등을 재조합해 바람 불면 날아가고 파도치면 쓸려갈 법한 위태로운 (스페인어 precario) 오브제를 만든다. 작가에게 <프레카리오스>는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는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 문제를 지적하는 은유법. 예를 들어 출품작 <세레브로 라리> (2014)는 과거 작가가 황제나비 멸종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허드슨강에서 펼쳤던 퍼포먼스의 부산물을 조립한 오브제다.  비쿠냐는 작은 생명체에서 거대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연약한 형태로 단단히 얽혀 있는 공존을 염원하고 있다. “확신할 수 없고, 위험에 노출돼 있으며, 위태롭다. precario는 기도라는 뜻의 라틴어 précis에서 왔다. (···) 지구는 인간 전용이 아니다.
한편 비쿠냐는 칠레 쿠데타를 겪으며 회화작업을 중단했지만, 2013년 “이제 충분히 나이 들었으니 괜찮다”는 말과 함께 ‘붓 맛’을 되찾았다. 현재 그는 4~50년 전 쿠데타 난리 통에 유실한 그림을 다시 그리는 잊힌 회화(lost painting)’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다. <험프가 있는 자화상>(2021)은 젊은 시절, 친구의 꿈에 나온 비쿠냐의 모습이다. 온몸에 젖꼭지가 솟고 땋은 머리카락이 흘러나오는 자신을 ‘메두사’처럼 그렸다. 어수선한 독재의 시간을 버티며 원작은 잃었지만, 2021년 비쿠냐는 기억을 더듬어 여유만만 나이든 젖꼭지 메두사로 자신을 묘사했다. 이처럼 ‘잊힌 회화’ 시리즈는 꺾었던 붓을 다시 한번 쥐어, 아픈 역사와 트라우마를 용서하고 보듬어보려는 노작가의 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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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loTorres>캔버스에유채139.4×118.7cm1978

비쿠냐의 작품 세계는 ‘시’라는 열쇠 말로 열어볼 수 있다. 실제 10권 이상의 시집을 낸 그는 자신의 작업을 “시각적인 시”라 표현하며 “의식이 곧 예술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의식을 담는 그릇, 그러니 ‘ 언어’가 비쿠냐 예술의 기본 질료이다. 세상을 적나라하게 Ctrl+c, Ctrl+v 하지 않고 낱말과 구절을 잘근잘근 되새겨 창조하는 궁극의 시적 세계. 비쿠냐는 현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은유와 비유로 사유의 밑바닥을 끌어올리는 시 짓기처럼 조형을 다룬다. 고로 비쿠냐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가장 뜨거운 저항이다.
현재 비쿠냐는 4월 1일 개막하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참여를 준비하고 있다. ‘ 빨갱이’ 콤플렉스로 홍역을 치른 두 도시, 광주와 산티아고의 치유자로 나선다. 비엔날레에는 책을 건네는 베트남 소녀 판화, 개인전에는 책을 받는 칠레 소녀 판화작품이 출품될 예정. 나긋한 어투로 열렬한 신념을 표하는 비쿠냐에게, 김혜순의 시 <별을 굽다>를 선사한다. 생을 달구는 에너지는 인간의 깊숙한 영혼에서 용솟음치는 것임을 덧붙이며.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 내는 분 계시겠지만 /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 땅속은 너무나 깊어 /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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