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와 영겁의 교차로
독일의 이유진, 한국 첫 개인전 <Junction> 개최 / 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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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stroke>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오일 파스텔 130×170cm 2020
어린 시절 눈을 감으면 머릿속을 떠다니는 형상에 치여 밤잠을 설친 기억, 누구나 있을 것이다. 사람, 동물 아니면 아침나절 잠시 시선을 뺏겼던 풀 한 포기의 형상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형태는 어느새 뭉개지고 흐트러진다. 창문 너머 솟아오르는 구름, 깊은 숲속 막다른 길 끝 호수, 잠옷 차림으로 낙타를 탄 소녀와 같이 낭만적인 몽상을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으로 작업하는 이유진. 그는 마법사의 충실한 전령이나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처럼 특정 문화권에서 공유되는 상징적 이미지보다 순간 포착해 마음에 남긴 일상을 표현한다.
2002년 대관령 넘어 서울로, 다시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로 떠난 이유진. 그가 데뷔 10년 만에 한국 관객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개인전 <Junction>(4. 1~6. 11 우손갤러리)을 열고, 인간과 자연을 모티프 삼은 근작 48점을 출품했다. 이유진의 작업은 관찰과 인식, 상상의 연결고리를 순환한다. 먼저 그의 회화를 살펴보자. 흐릿한 화면은 미지의 세계를 담는 공간이자 관객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개입할 수 있는 창이다. <베어>(2011)은 포옹하는 곰과 사람을 안팎의 경계가 없는 덩어리로 표현했다. <수고양이>(2019)는 앙칼진 고양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을 담아냈다. 여백을 최소화해 생생한 긴장감을 전한다. <보디가드>(2019)는 몸집을 한껏 부풀린 부엉이와 마스크를 쓴 인물을 그렸다. 생경한 풍경은 앞으로 벌어질 미지의 사건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명료한 제목과 아리송한 형태의 조각은 회화의 연장선 격이다. <두꺼비>, <여성 운전자>, <금박> 등 조각 5점을 가정용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모두 올해 제작된 신작. 주제 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지만, 회화에서 뚜렷이 보이던 서사를 걷어내고, 솜뭉치를 뭉쳐둔 것 같은 유려한 곡선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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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ote> 철, 폴리머클레이, 금박, 래커, 아크릴릭, 에폭시 32×12×15cm 2021
드로잉과 판화는 회화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면보다는 선을 강조하고 형태도 더욱 분명하다. 흑백의 대비를 명확히 해 여백과 선을 강조한 2019년작 <하이에나>, <스카이워커>, <펜싱 마스크>, <선풍기 얼굴>. 직관적인 작품명은 깊은 어둠에 모호하게 떠오르는 대상을 추측케 한다. 그는 회화와 판화의 상이한 미학을 양자택일의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흑과 백이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검정이 얼마나 더 검정일 수 있는지…. 어둠이 깊어질수록 작업은 확장한다. 판화는 공간을 찍어내는 작업이다. 회화는 중립을 찾아 나가는 행위이지만 판화는 찍을 것이냐, 안 찍을 것이냐 선택할 수 있다.”
이유진은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지만, 자신의 철학과 정서는 한국에서 찾는다. 그 원천은 “두 언어 사이의 줄타기 요령을 터득하는 것”. 인생의 절반을 사용한 독일어가 한국어보다 편할 법도 하건만 그는 한국어의 은유와 의성어, 의태어가 가진 이미지를 탐구해 작업으로 풀어낸다. 뭉툭하고 유연한 구름의 형상을 취하는 것 같지만, 그 안을 뜯어보면 베일 듯 날카로운 사유가 숨어 있는 이유다. 관객이 연상하는 모든 의미를 폭넓게 수용하지만, 작업 과정에서 빈틈없이 내면을 탐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오는 5월 아시아 아트바젤 홍콩 <인사이트> 섹션에 솔로 부스를 마련한다.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도약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인상적인 순간은 길다. 관객이 아름다운 기억을 깊이 음미하도록 돕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며 다짐을 전했다. 이번 전시에는 찰나와 영겁의 교차로에서 삶의 무게를 덜고, 봄볕을 선물하고픈 작가의 따뜻한 소망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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