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바다 풍경

2021 / 04 / 18

화가 이우성, 첫 애니메이션 발표 / 조현대 기자

<어쩌면 우리에게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1969장의 움직이는 그림, 싱글채널 비디오 6분 32초(루프) 2021

눈을 감아보자. 당신의 기억 속 바닷가 풍경을 그려보라. 아니, 꼭 본 적 있는 바다일 필요도 없겠다. 그냥 바다를 떠올려보자. 넓디넓은 해변, 인적은 드물다 못해 아예 없다. 파도가 흰 소금 거품을 머금은 채 모래사장으로 밀려든다. 잔잔한 파고에, 파도 사이사이 간격은 넓다. 반대편 해변에선 일몰이 지고 있고, 야트막한 산봉우리 앞으로 조명이 희뿌옇게 어른거린다. 그때 거기서 당신은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아니, 듣고 싶은가? 시원한 기타 리프로 가슴을 뻥 뚫는 시티 팝일까, 잔잔한 비트가 귀를 간질이는 재즈 힙합일까.
이우성이 떠올린 바다는 5년 전 가봤던 뉴질랜드 남섬의 대표 도시 크라이스트처치 앞바다였다. 그때 그 바다가 두산갤러리 개인전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3. 3~31)에 펼쳐졌다. 이우성은 레지던시 교류 프로그램 참여로 크라이스트처치에 머물던 차에 이 바다 풍경을 마주쳤다고. 누구나 그러듯 풍경을 영상으로 기록해뒀다.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와중에 추억 여행을 떠났다. 기억을 되돌려서,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을 떠올린 거다. 평화로운 해변가야 말로 많은 사람이 그리워할 장면이라고도 생각했다. 영상을 틀어놓은 11인치 노트북 모니터 화면에 OHP 필름을 대고 그대로 따라 그렸다. 그렇게 완성한 총 1,969장의 드로잉을 이어 붙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전시장에는 그의 첫 드로잉 애니메이션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2021)이 커다랗게 영사되는 가운데, 드로잉 일부를 벽에 걸어뒀다. 전시장 바깥 창에는 두 인물이 함께 서핑보드에 올라타 있는 장면을 그렸다. 이 이미지는 이번 신작의 출발점이다. 인물을 그려넣기 벅찬 작은 필름 대신 훨씬 넓고 투명한 평면을 찾아낸 셈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전경 2021 두산갤러리

이우성의 그림에는 평소 자주 지나치는 거리, 주변 친지와의 시간 등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만큼 바깥을 나다닐 수도,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일 수도 없다. 이우성에게 일상이 사라졌다는 말은 곧 그림의 소재를 빼앗겼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가 작업실에 틀어박혀 11인치 크기의 노트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크기와 물성이 달라진 화폭에 안성맞춤인 도구도 찾았다. 오일 파스텔은 투명한 필름 표면을 겉돌며 색깔이 번지고 섞인 자국, 꼬질꼬질한 손때를 만들었다. “작품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사진을 찍는 대신 스캔했다. 별다른 보정도 없다. 이번 전시에서 영상을 주 매체로 선택했지만, 난 원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까. 그 정체성을 아주 슬며시 드러내는 전략이다.”
이우성은 ‘평면’을 가리지 않는 화가다. 굳이 제대로 ‘와꾸’를 짠 캔버스나 유화 물감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의 ‘걸개그림’이 그렇다. “우선 프레임이 없으니 접어서 보관하거나 옮기기 좋다. 전시 환경에도 크게 구애 받지 않는다. 난 이런 유연함이 좋다. 코딱지만 한 작업실에서 한 칸 한 칸 접어 그린 작품을 전시장에 쫙 펼쳐서 걸 때의 쾌감도 있다.” 최근 몇몇 전시에서 엽서 크기 쯤 되는 드로잉을 나란히 디스플레이해 선보이기도 했다. 회화 작품에는 잘 그려 넣지 않는 일상의 구체적 정황이 나타나 있다. 천천히 따라가면서 ‘젊은 화가’의 친구, 술자리, 고민을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다. 때로는 그의 욕망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작지만 소중한 그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1969장의 움직이는 그림, 싱글채널 비디오 6분 32초(루프) 2021

이번 전시로 돌아와서, 전시장에서 애니메이션과 함께 재생되는 차분한 분위기의 피아노 연주곡은 이우성의 오랜 친구이자 피아니스트 어자혜의 작품이다. 어자혜는 프랑스에서 프로페셔널 즉흥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예전부터 음악가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바다 풍경이라고 무작정 파도 소리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어자혜에게 작업 초안을 조금 보여줬더니 금세 곡이 나오더라.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본다.” 이우성의 말에 따르면 연주곡에는 들릴 듯 말 듯 소음이 섞여 있다. 이들이 각자 방 안에서 그림 그리고, 건반을 두드리며 스민 소리다. 고립된 상황을 위로하려 쌍방을 오간 화이트 노이즈처럼 말이다.
편안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전시라는 소감에 이우성은 마냥 편안함을 추구하진 않았다고 답했다. 낯선 곳에서 새삼 느낀 막연한 답답함, 그저 멍했던 기분도 녹아 있다고 했다.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고민과 어려움이랄까. 그래서 괜스레 더 친근하다. 나와 다르지 않아서, 이우성 작품의 편안하게 느껴지는 결정적 이유다. 한편 그는 최근 인스타그램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긴긴밤부엉이’라는 ‘토크+드로잉 개인 방송(?)’을 진행 중이다. “사실 좀 쑥스럽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누군가와의 대화가 간절했다. 내 작업의 과정을 좀 더 오픈해보고도 싶었고. 혼자 사부작거리는 맛으로 했는데 어느새 고정 시청자가 생겼다. 그래봐야 열 명 남짓이지만.” 다음 전시 계획도 ‘긴긴밤부엉이’와 관련 있다. 사진작가 겸 공간 운영자가 라이브 스트리밍을 확장한 전시 프로젝트를 제안해왔다고. 이처럼 디지털 세대의 미술가는 전시장에도 있고, 핸드폰 액정 안에도 있다. 작업실에 앉아서도 서걱서걱 사부작사부작 연필 굴러가는 소리를 들려주며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미술가는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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