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보여
박주연, 8년 만의 국내 개인전 <언어 깃털> 열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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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셋 챕터의 시간> 종이에 잉크와 흑연 106×1,225cm 2021
박주연은 진정한 소통에 다다르지 못하는 언어의 불완전함에 천착해왔다.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그의 개인전 <언어 깃털(Other Feathers)>(3. 26~6. 6)이 열렸다. 8년 만의 국내 개인전이다. 출품작은 5점. 스틸 조각, 원고지 드로잉, 사운드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전시명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의 선집 『모랄리아』 중 사냥꾼이 깃털이 몽땅 뽑힌 나이팅게일 새에게 “너는 그저 하나의 목소리일 뿐이구나”라고 말한 일화에서 빌려왔다. 박주연은 깃털이 벗겨진 새를 ‘언어로부터 해방된 본질’로 봤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전시와 출품작 모두 국문명과 영문명의 의미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두 제목은 서로를 보완하는 한쌍으로, 풍부한 의미와 이미지를 연상하도록 이끈다.
박주연은 15살부터 한국을 나가 살며, 오랫동안 외국어를 사용했다. 그 낯섦을 익숙함으로 길들여왔을 테지만, 현지인과의 관계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경이 작업의 근거로 쉬이 읽히는 것을 경계한다. “나는 다른 언어와 문화 간 오역을 견제하고 조율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 특수함을 정체성 담론으로 연결 짓고 싶진 않다. 정체성도 언어처럼 늘 불완전하니까.”
박주연의 초기 영상작품 <삼인칭 대화>(2006)에는 여러 사람과 통화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필요에 따라 부산 사투리와 표준어로 대화하다가, 이윽고는 영어 통역원과도 소통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에 그친다. <비계>(2012)는 영어를 ‘학습’한 사람의 영작문 글을 원어민이 수정한 교정 부호와 주석의 흔적만을 남긴 작품이다. 텍스트가 지워진 자리는 여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언어 간 위계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 출품작 <열 셋 챕터의 시간>(2021)을 살펴보자. 200자 원고지 총 260매가 오와 열을 맞춰 걸려 있다. 박주연은 원고지의 칸에 글자 대신 원을, 펜과 연필로 그려놓았다. “2019년작 <Twenty times a Thousand>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시 「에코의 뼈」(1935)에 화답코자,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은 에코를 주목했다.” 원고지에 그려진 원에서 언어의 껍데기를 벗은 순수한 목소리가 ‘보인다’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그녀가 노래를 말할 때>(2021)는 사람의 육성, 새 지저귐, 악기음 등으로 구성된 6채널 사운드작품이다. 악기는 오케스트라 조율의 표준음을 내고, 말소리는 영어, 그리스어, 한국어로 들려온다. 작가는 직접 수집한 단어와 문구로 대본을 썼고, 네 명의 그리스인 보컬리스트가 말로 옮겼다. “누구도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목소리가 더 부각된다. 그리스인의 서툰 영어, 한국어 발음은 목소리를 의미로부터 더 멀리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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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눈> 스틸에 채색 70×70cm 2021
스틸 조각작품 <곡선의 길이>와 <상처>, <눈먼 눈>(이상 2021) 모두 팬데믹 경험과 관련된다. 그는 2m 간격만 유지하면 얼마든지 여러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영국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이 ‘2m’에 주목해 같은 길이로 재단한 철판을 둥글게 구부러트렸다. 더 이상 2m에 달하지 않는 이 철판 <곡선의 길이>는 방역 당국의 엄중한 규칙을 한낱 종잇장마냥 가볍게 만든다. 전시장 테라스의 <상처>는 <곡선의 길이>와 흡사한 모습이나, 종이가 찢긴 듯 마감됐다. 도시 봉쇄로 집에서 제작한 종이 작업의 재료와 스케일을 바꾼 버전이다. <눈먼 눈>은 여러 문학적 레퍼런스가 한데 녹아 있다. 흰 물감으로 뒤덮여 대상을 반영하지 않는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나르시스의 비극을 떠올린다. 작업의 주제는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1995)의 ‘백색 실명’과 겹치며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의 상상력을 구체화한다.
대부분의 발화는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 언어 소통은 불발되기 마련이다. 박주연은 언젠가 “자발적인 실패”를 언급한 적 있다. 베케트도 불어 ‘poussiere(먼지)’를 영어 ‘bones(뼈)’로 옮기며, 완전한 의미 전달의 실패를 감수하고 ‘분절적 자기 번역’을 실천했다. 박주연 작업의 숱한 오역과 의미의 공백은, 이미 ‘실패한’ 소통 방식으로서 언어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누군가 종말을 고한 적 있는 동시대미술이 세계의 실패와 모순을 비집고 들어가 사유의 공간을 창출하며 잔존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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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개인전 <언어 깃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