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환상의 '포털'
미국 작가 조나단 가드너, 아시아 첫 개인전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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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가드너(Jonathan Gardner).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그가 한국 관객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2011년 데뷔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작가가 아시아에서 선보이는 최초의 개인전이다. 국내에는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전 세계 유수 갤러리의 러브 콜을 받으며 아트마켓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제이슨함갤러리 함윤철 대표는 해외 미술현장에서 우연히 작가의 작품을 발견하고 강렬한 인상에 매료되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작가와 전속 갤러리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어 업계 지인에게 소개받지 않고 갤러리에 직접 연락을 시도했다. 제이슨함갤러리를 완공하기도 전, 건축 모형을 들고 뉴욕 갤러리에 방문해 화랑업에 대한 나의 열정을 표현했다. 2년 정도 지나 다시 연락하자 작가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그때 맺은 인연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제이슨함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첫 개인전 <수평선(Horizon)>(4. 22~6. 15)에는 수평선을 넘어온 작품 5점이 공개됐다. 모두 2019~20년에 제작한 신작 및 근작이다. 해변에 비치 타월을 깔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거나 독서삼매에 빠진 여성들, 그 주변을 에워싸는 한적한 자연 풍경은 고립된 팬데믹 시대에 희미해진 레저의 추억을 환기한다.
가드너는 1982년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렉싱턴의 한적한 마을에서 성장했다. 창작열도 가족력일까, 그의 조부는 신발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모계 쪽은 저명한 그래픽디자이너 피터 코리스턴(Peter Corriston)과 인연이 있다. 코리스턴은 유명 록 밴드 레드제플린과 롤링 스톤스의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주역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이 가드너가 작가가 된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학창 시절 낙서처럼 그린 드로잉을 선생들에게 인정받고 격려받으며 진지하게 화가의 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후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 시카고예술대에 진학했고, 시카고에서는 짐 너트(Jim Nutt)의 수업 조교로 들어가 인물상 표현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다.
가드너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가지로 특징 지을 수 있다. 첫째, 미술의 역사. 미술사는 그의 작품을 논할 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키워드다. 그는 역사적 마스터피스,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팝아트 사이를 성큼성큼 뛰어다닌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르네 마그리트, 페르낭 레제, 리차드 린드너, 존 커린의 그림을 레퍼런스 삼아 특유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대상은 과거의 규범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고전 작품과 만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시간, 즉 현존이다. “나는 거의 모든 회화 스타일에 관심을 둔다. 페인팅은 다른 예술 형식들과 다르게 시간에 의존하지 않아서 매력적이다. 그것은 항상 현재 시제로 존재한다. 어릴 적 시카고미술관에서 피카소의 <Guitar Player>를 처음 실견한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와! 피카소가 1909년쯤 그린 붓 터치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화가가 신체를 움직인 흔적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제 시간에 멈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 보듯이 과거의 그림과 마주한다. 그림은 또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포털(porta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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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bathers> 리넨에 유채 223.5×162.6cm 2019
작가의 두 번째 작업 특징은 평면적 공간감이다. 수평으로 분할되는 구조, 다성의 내러티브, 아이콘화한 자연은 낙천적이고 순진무구한 감수성을 자아낸다. 그 독특한 이미지 배치는 특히 <Sunbathers>(2019)에서 두드러진다. 바닷가에서 즐겁게 휴식을 취한 작가의 기억이 담긴 이 그림은 피카소 <Bathers>의 발랄한 분위기에 착안했다. 여기에 티치아노의 고전적인 여성 포즈를 결합해 익숙하면서도 묘한 세계를 창출했는데, 원근감 없는 판판한 구성은 이집트 미술과도 닮았다. 평화로운 주제와 귀여운 형상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감상하기 ‘쉬운 그림’이지만, 그 작업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대부분의 화가처럼 가드너 역시 캔버스에 최종 결과물을 구현하기 전 틈틈이 스케치북 드로잉을 그려둔다. 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를 여러 장 그리는 대신, 하나의 드로잉을 완성하면 그 위에 트레이싱 페이퍼를 올리고 기존의 선을 따라 그린다. 드로잉은 다른 종이에 복사하는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수정되기도, 가위로 조각조각 오려져 새로운 ‘퍼즐’로 콜라주되기도 한다. “나는 트레이싱 페이퍼로 각기 다른 요소를 결합하고, 하나의 드로잉에서 다른 드로잉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같은 이미지를 축소하거나 확대하면서 스케일의 차이가 주는 감각을 가지고 놀기도 한다. 다른 아이디어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면 내가 봐도 놀라운 결과가 탄생한다. 또한 그 과정을 페인팅을 구상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다. 비록 이러한 작업 과정은 결과물에서 확인할 수 없고, 더군다나 내 그림은 꽤 일관성 있어 보이기까지 하지만, 나는 항상 새로운 페인팅 방법론을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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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unes> 캔버스에 유채 167.6×106.7cm 2020
가드너 작품의 세 번째 키워드로는 ‘여성’을 꼽을 수 있다. 작가는 일상의 경험을 통통 튀는 상상력과 섞어 환상의 풍경을 연출하는데, 여성 신체를 향한 관심은 미술사가 형상화해온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림을 그린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나의 본능이 창작 동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비판적이고 학문적인 태도일 때보다 내면의 진솔한 에너지와 낭만적 감성을 끌어낼 때 훨씬 강렬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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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stre> 캔버스에 유채 106.7×86.4cm 2020
한편, 가드너의 그림은 착시화(trompe l’œil)로 불리기도 한다. 알록달록한 꽃을 그린 <Silvestre>(2020)의 화병 뒤 거울은 또 다른 공간을 암시하며, 갤러리의 말끔한 화이트 큐브에 걸린 해변 그림은 바깥을 향해 열린 창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착시를 일으킬 만큼 능청스럽게 공간에 스며드는 전략. 단순하지만 치밀한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가드너의 그림에는 단 하나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위해 이미지를 구상하고, 트레이싱하고, 조합하고,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지난한 노력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말한다. “새로운 작업을 창조하는 일은 낚시와 닮았다. 당신은 그것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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