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봉합’의그리드

2021/06/14

라이징 아티스트 맨디 엘-사예의 한국 첫 개인전 / 김해리 기자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f755d105ddd5b13ab1125e4c5a81d190390c40fc-500x334.jpg

<수호를위한명문>전시전경2021

말레이시아 태생의 젊은 작가 맨디 엘-사예(Mandy El-Sayegh).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에 해당하는 셀랑고르(Selangor)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는 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2019년 런던 치젠해일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는 중이지만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얼굴. 글로벌 아트씬의 라이징 작가가 한국 첫 개인전 <수호를 위한 명문(Protective Inscription)>(5. 20~7. 17 리만머핀 서울)을 개최했다. 회화, 설치, 오브제,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왕래하는 맨디 엘-사예.
이번 전시에선 덕지덕지 붙은 신문과 거즈, 꼬불꼬불 아랍 문자와 불교 도상이 뒤엉킨 대형 작업으로 전시장 벽을 꽉 채웠다.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라면 2020부산비엔날레 본 전시장에서 제법 큰 섹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수호를 위한 명문>에는 작가를 대표하는 <네트-그리드(Net-Grid)>(2021) 시리즈와 사운드작업 <Chalk>(2021)가 출품됐다. 8점 모두 올해 제작된 신작이다. 엘-사예는 높은 천장의 전시장을 꼼꼼히 메운 회화와 염불 소리, 일렉트로닉 음악, 주변 소음, 종소리의 믹싱 사운드로 ‘사람 몸속에 들어간 기분’을 의도했다고. “나는 시각적 파편과 물질적 레이어로 ‘새로운 신체’를 만들어낸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537246cb0bdcc549c8c9edee54921a40188f796e-500x667.jpg

<WALL>실크스크린된리넨에유채,혼합재료188×120cm2021

엘-사예의 대표작 <네트-그리드>(2013~) 시리즈. 리넨이나 라텍스 바탕에 천, 실크, 거즈, 신문, 부적, 목판화 등을 콜라주하고, 그 위에 그리드를 직접 그리거나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낸다. 작가는 특별히 이번 한국 개인전을 위해 17세기 제작된 원각사 무량수여래다라니 목판본을 <네트-그리드>에 그렸다. 아미타불 도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총 16종의 부적 도상이 배치된 원각사 무량수여래다라니. 몸에 부착해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의 사용법과 붉은색 상형의 조합이 흥미를 끌었다고 한다. “나는 마치 빨간 피를 흘리는 듯한 이미지가 좋았다. 이미 복제된 목판화를 다시 복제한다는 아이디어도 재밌었고. (···) 문화적 기호가 어떻게 재번역되고, 잘못 이해될지 궁금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맥락이 탄생할까?”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 예술의 도상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회화. 네모난 구멍 사이로 알쏭달쏭한 의미가 떠올랐다 흩어지고, 포획됐다 빠져나가곤 한다. 작가의 시각 언어는 바로 ‘분열과 중첩’. 그래서 그리드의 ‘그물’로 도대체 잡겠다는 건지 풀어준다는 건지 헷갈린다. 복잡하게 얽힌 네트 이미지에서 무엇을 캐치할지 고민하는 관객을 위해 그의 작품을 요목조목 뜯어본다.
우선, 방법론은 ‘호더링(hoarding)’. 목적에 맞춰 의식적으로 사물을 취사 선택하는 수집과 다르게, 호더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모으는 일종의 강박증이다. 다양한 오브제와 방대한 개념을 폭식하듯 집어삼켜 작업에 울컥울컥 뱉어내는 엘-사예. 이 방법론은 작가가 RCA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의 선생이 던진 ‘네 원천을 인용해라(Cite your sources)’라는 말에서 영향받았다. 이후 작가는 자신과 가족에 관한 다양한 사물은 물론, 평범한 일상용품을 끊임없이 호더링한다. 이 중 <네트-그리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거즈는 조산사인 작가의 어머니, 아랍어 글씨는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술탄 빈 무하마드 알 까시미를 위한 캘리그라퍼로 일했던 아버지의 흔적이다. 이처럼 엘-사예의 페인팅에는 사적인 물품과 공적인 재료가 뒤섞여 있다. 실제 그의 스튜디오에는 가지각색의 사물이 널려 있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탐정이 작업실을 수사해도 엘-사예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추적하기 힘들 거라고. 그만큼 작가는 교차하는 의미망에 방점을 둔다.
이제 호더링의 결과물을 차근차근 분류해 그 내용을 살펴볼 차례. 첫째, 반(反)사회. 엘-사예는 다중 레이어로 명료한 해석을 방해한다. 이는 공고한 질서와 합의된 진리를 요리조리 피해 기존 사회의 틀을 교란하려는 시도다. 가령 작가는 <Figures Ground> 시리즈, <네트-그리드> 시리즈 등에 『파이낸셜 타임즈』 신문을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르거나 다른 사물을 부착해 일관된 읽기를 가로막는다. 이는 해당 신문이 가진 세계적인 위상을 개인적인 이야기, 예술적인 제스처로 전복하려는 저항의 행위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5ced74d6c858c6734f4ae633e425c407f88b72db-500x375.jpg

<transliteratedcutscript> 실크스크린된리넨에유채,혼합재료146×156cm

또 다른 작업으로는 엘-사예의 ‘유사 아카이브(quasi-archives)’ 시리즈가 있다. 의료용 테이블에 시시콜콜한 소지품과 대량 생산된 상품을 병치한 오브제작업 <이걸 뭐라고 부르지? 몰라, 그냥 이것저것 줍는 거야, 난 그저 허드레꾼인 걸.>(2020부산비엔날레 출품작)이 대표적인 예. 거대 자본이 결정하고, 분류하고, 확산한, 그리하여 종국엔 버려진 시스템의 부산물로 시스템에 잠식된 개인의 상황을 직시하도록 만든다. 정치 사회의 네트워크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현실을 과잉된 아카이브로 펼친다.
둘째, 신체성. 엘-사예는 <네트-그리드>의 표면을 ‘피부’, 자신의 작업 과정을 ‘봉합’이라고 칭한다. 다양한 물질의 레이어가 층층이 쌓이면 페인팅 표면이 마치 멍든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상처 난 피부에 약을 바르 듯 작업의 마지막 과정에 다층의 겹을 연결하는 그물로서의 그리드를 그린다. “내가 ‘신체’라고 말하는 건 시스템에 붙잡혀 있는 파편의 총체다. 신체의 결합 조직을 닮은 그리드는 분리된 근육을 이어 움직이도록 하는 연속체.” 다만 엘-사예에게 그리드는 치유의 수단이기도 하고, 부패의 과정이기도 하다고. 이는 불교에서 시체 부패의 아홉 단계를 일컫는 ‘구상(九想)’ 개념에서 작업을 출발했기 때문이다. 치유든 부패든 한시적인 봉합의 성질처럼, 결국 작가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다. 작가가 전시장을 ‘명상의 공간’으로 상정한 이유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셋째, 그리드의 역사. 서양 현대미술사는 그리드의 개념을 다투며 전개됐다. 모더니즘에서 미니멀리즘까지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리드의 의미. 더욱이 ‘네모’는 한자의 입 구(口), 한글의 미음(ㅁ), 모눈종이의 한 칸, 전시장의 화이트 큐브, 건물의 주춧돌처럼 문화, 사회에 따라 다종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엘-사예는 맨 처음 옷 재봉사가 1cm 간격으로 긋는 붉은 격자를 보고 완벽한 통제, 단단한 결박의 모티프로 가져왔다. 허나 이후 한 칸 한 칸이 담아내는 캔버스 표면을 보며 그리드의 투시성과 다공성을 깨달았다고. 엘-사예는 사각의 형식 미학 틈새로 나타나는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여백과 공백, 침묵과 진공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힘’. 그에겐 예술의 불명료함이 사회를 변화시킬 무기다.
엘-사예는 자신 작업의 오독과 의역을 적극 응원한다. 예상치 못하게 만들어낸 관객의 대안적 언어와 새로운 의미가 ‘탈출구’가 될 것이라 믿어서다. 그에겐 부분과 전체, 개인과 사회, 삶과 죽음은 다의적 그리드에 생겼다 사라지는 동의어다. 망원경으로 당겨본 우주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포가 같은 형상을 하는 것처럼.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c50e223a226878bd5e97c18962299a4b1cfb7b7e-500x334.jpg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2024.11.01~)
[만료]고흥군청(2024.11.01~2025.01.08)
[만료]한솔제지(2024.11.13~2025.01.08)
아트프라이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