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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뒷모습,세계의진실

2021/07/06

교수에서 전업 작가로, 부산에서 안규철 첫 개인전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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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지않는벽>종이에연필30×40cm2021

마른 체형에 서글서글한 눈매, 숱 많은 곱슬머리, 차분하고 짜임새 있는 화술. 안규철이 교직 생활의 마지막 장을 덮고 23년 만에 전업 작가로 돌아왔다. 그의 첫걸음은 부산을 향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5. 13~7. 4)을 열고 회화, 드로잉, 설치 36점을 소개했다. 교편을 잡은 중에도 작품 활동을 쉰 적은 없으니 뜻밖의 소식이라 이르기는 힘들지만, 작가로서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의의가 크다. 또한 그가 부산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30년의 활동 중 23년을 ‘교수 작가’로 보냈다. 지난해 학교를 떠나 자유로워지니 아무것도 없던 무명작가 시절이 떠올랐다. 이제야 다시 전업 작가로, 원래 위치로 돌아온 기분이다. 그동안 미흡했던 것, 하지 못했던 것, 결여된 것을 하나씩 점검하면서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보려 한다. 지금껏 해온 작업 중 어떤 걸 남기고 무엇이 부족한지 돌아보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전시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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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권력,자유>옷,나무,가죽170×110×5cm1992

작가의 바람에 따라 이번 개인전은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는 자리로 구현됐다. 1990년대 초 초기작부터 2021년 신작까지, 안규철의 30년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작품이 관객을 반겼다. 전시의 키워드는 ‘뒷모습’이다.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제목에 내 작업의 핵심이 녹아 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뒷모습에서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일상에 가려 보이지 않은 평범한 사물의 뒷모습을 조명하면서 사물의 진짜 모습, 그곳에 담긴 세계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테면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 대신 뒤통수, ‘웰컴 매트’ 깔린 대문이 아니라 ‘스태프 온리’의 뒷문, 온갖 미사여구로 코를 꿰는 광고 면 너머 희멀건 백지가 ‘사물의 뒷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뒷모습이란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로 형체를 감추는 제스처가 아니다. 계산 착오로 적에게 약점을 들킨 방심의 표본도 아니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순간일지 모른다. 유년 시절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한 부모님의 뒷모습. 포근하게 안아주는 두 팔이 아니라 희끗한 머리칼과 늘어진 어깨, 점점 줄어드는 몸집을 새삼 느끼고, 익숙한 대상의 생소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사유에 빠지는 것. 작가가 말한 ‘세계의 진실’이란 낯선 물음과 조우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그리고 작업은 질문을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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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개인전<사물의뒷모습>전경

안규철은 전시 출품작 중 남다른 애정을 갖는 작품으로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II>를 지목했다. 1991년, 1996년, 2021년 재제작하며 벌써 세 번이나 되새김질한 설치작업이다. 나무로 만든 문짝과 메마른 화분에 자라난 의자로 구성됐다. “1991년 독일의 한 작은 대안공간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처음 전시에 참여했다. 전시장 벽에 두 짝의 문이 붙어 있는데, 한쪽은 인생(Leben), 다른 쪽은 예술(Kunst)이다. 인생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으니 예술로 들어가야 할 판인데, 여기엔 손잡이가 5개나 달려서 열기가 어렵다. 이때 전시장 공간은 인생과 예술 사이의 애매한 중간 지대를 상징한다. 그 안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가, 예술가 된답시고 독일까지 와서 도대체 뭘 하는가 자문하면서 의자에 내 상태를 투영했다. 죽은 나무로 만든 의자를 화분에 심고, 그걸 키워서 다시 살아 있는 나무로 만들어내려는 불가능한 일을 내가 하고 있구나…. 불가능한 모험과 도전으로 어떻게든 닫힌 문을 열고 예술의 길로 들어서야겠다는 다짐이 깃든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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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칠판이아니다>나무에초크보드페인트,아크릴릭150×75×40cm1992/2021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대형 전시를 개최해온 작가에게 이제 첫 작품은 시시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그는 번번이 ‘무명작가’ 시절을 반추한다. 30년 전 작업에 덧씌운 표피를 벗기고 벗겨 당시엔 미처 잡지 못한 사고를 발굴하고 그것이 지금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한다.
출품작들은 ‘뒷모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공유하지만, 전시장에 막 들어온 관객의 눈에는 작업 간 연결 고리가 느슨하게 비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시적인 텍스트, 색으로만 채운 페인팅, 구두와 양복, 칠판과 망치, 단편 만화 같은 드로잉이 아담한 전시장에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작가의 설명은 30년간 예술관을 심화하며 양상을 달리해온 ‘작업의 뒷모습’을 이해하는 데 힌트를 준다.
“내 ‘작가적 여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작업을 압축해 모았다. 그간의 작품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일상 오브제. 일상의 사물을 재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오브제 조각이다. 둘째, 텍스트. 이미지 대신 글이 작품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작업이다. 셋째, 대형 설치. 건축적 규모의 설치작품도 한 축을 차지한다. 마지막은 2010년 이후로 시도한 영상과 퍼포먼스다. 누구든 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난해한 철학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시각적인 매혹을 기대하는 이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작업이지만, 미술이 감각적인 가치만 추구한다면 예술의 근본 가치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내 작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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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개인전<사물의뒷모습>전경

작가는 이번 전시를 맞아 앞선 3월 동명의 에세이집도 출간했다. 그는 1980~87년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고 다수의 저서, 역서를 펴낸 달필로도 유명하다. 
『사물의 뒷모습』은 2014년부터 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과 그림 69편을 엮었다. 작은 모래알이 모여 해변을 이루듯, 하루하루의 단상으로 발견한 ‘세계의 뒷모습’들이 책 한 권에 담겼다. 작가는 이를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간 시간들의 기록”이라 부른다. 사람들 사이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흐르는 시간을 일컫는 독일식 표현을 빌려, 일상 사물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관찰하는 사색의 순간에 다가갔다. “매일 조금씩 써온 글을 묶었다. 내 작품은 글을 쓰고 생각을 모으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이 전시의 모든 작업에 기반이 되는 짧은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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