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동화, 기쁘고 슬프고
2021 / 08 / 02
페로탕 서울, 크리스탈로바의 한국 첫 개인전 <소프트 퍼레이드>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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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forest> 유약을 바른 석기 57×75×38cm 2021
춥고 척박한 기후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흔히 북유럽으로 불리는 이곳하면 떠오르는 것은? 오로라와 백야의 땅, 바이킹의 고향, 복지의 왕국, 하드락과 전자음악의 본산…. 특히 북유럽의 신화와 동화는 오늘날 세계 곳곳의 대중문화 영역까지 진출했다. 피터 잭슨이 영화화한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의 세계관은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창조됐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핵심 히어로 ‘토르’도 원래 북유럽 신화의 ‘애시르 신족’ 출신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도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작품이 모체고, <겨울왕국>의 시공간적 배경은 노르웨이 왕국에서 빌려왔다. 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스톡홀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클라라 크리스탈로바(Klara Kristalova) 또한 이곳의 풍부한 동화적 상상력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가 흙으로 빚고 구워 만든 얼굴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어깻등에서는 날개가 자라난다. 숲의 정령이 정말로 있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영화 속 강력한 힘으로 뮬니르를 휘두르는 토르처럼 신묘하고, 실의와 술에 빠져 토실토실 살이 오른 토르만큼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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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크리스탈로바 개인전 <소프트 퍼레이드> 전경
크리스탈로바가 페로탕 서울에서 한국 첫 개인전 <소프트 퍼레이드(Soft Parade)>(6. 24~8. 13)를 열었다. 출품작은 총 40점, 동식물과 결합된 신체의 인물 도자조각과 드로잉으로 구성됐다. 1층 전시장은 마치 여름날의 싱그러운 숲을 옮겨온 듯 꾸몄다. 사람 키보다 조금 낮은 언덕배기에 미처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들꽃과 풀이 무성하고, 사이사이 다양한 형상의 인물, 동물 조각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다. 토끼 귀가 돋아난 소녀, 나무껍질 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 코발트블루색의 털을 가진 염소 등 환상 동화 속 징그럽지만 귀여운, 반가우면서도 오싹한 괴수들이다. 전시장 벽 사방에 걸린 드로잉 속 생명체들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듯 디스플레이됐다. 크리스탈로바는 일종의 사전 스케치 삼아 드로잉을 하지만, 조각작업을 착수하는 순간부턴 드로잉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스케치로 구체화한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다른 분위기를 내고 싶거나 특별한 색과 빛을 상상하다보면 조각작품은 애초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엔 드로잉이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고 해야 할까…?”
크리스탈로바의 주된 재료는 흙이다.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든 다음 채색을 하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구워 작품을 완성한다. 꽤나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는 유럽은, 그가 스톡홀름 왕립예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할 때나 지금이나 도예를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취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크리스탈로바는 그래서 도예를 선택했다. “회화나 조각과 달리, 딱히 역사를 의식하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흙이야말로 자유롭게 나만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재료였다. 한편 내게 평면은 너무 납작하고 비좁았다. 실제 공간에 형체를 구축하는 일에 더 능숙한 편이기도 하고.” 크리스탈로바가 사용하는 점토는 두 종류다. 구워냈을 때 잘 깨지지 않는 석기(stoneware)로는 비교적 큰 규모의 작품을, 표면이 희고 깨끗한 자기 (porcelain)로는 보다 선명한 채색이 필요한 작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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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cat> 유약을 바른 석기 39×21×16cm 2021
일견 밝고 활기차게만 보이는 크리스탈로바의 작품은 사실,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 그가 그려 넣은 인물의 기묘한 표정을 살펴보자. 3층 전시장의 연분홍색 민소매 옷을 입은 검은 고양이(<Portrait of a Cat>)는 눈은 멀뚱멀뚱 뜨고 입만 웃고 있다. 온갖 날짐승과 날벌레에 둘러싸인 여성(<Creature Flying and Standing Still>은, 커다란 나방이 얼굴을 가려버려 행복한지 불쾌한지 두려운지 알 수 없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동화적 상상력과 함께 비탄의 경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남들보다는 조금 일찍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물론 매 순간 어머니를 떠올리며 슬피 살고 있진 않지만, 내 창작욕의 일부는 분명 죽음에 대한 경험과 사유에 기대어 있다. 아마 내 의지와는 반대로, 매일같이 죽음을 떠올리고 또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스위스 루체른미술관장 파니 팻저(Fanni Fetzer) 또한 이번 개인전 개최와 동시에 출간된 화집의 에세이 「Why Klara Kristalova’s Figures Talk to Us」에서, 크리스탈로바의 작품을 죽음의 상실, 억압, 괴로움을 드러내는 일종의 ‘이드(id)’, 즉 무의식의 표출로 간주한다. 크리스탈로바 작품의 기쁜데 슬픈 표정들은 어쩌면 자아가 형성되지 않아 선악의 구분이 무의미한, 그래서 죽음에 초연한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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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ar Is Born> 유약을 바른 석기 22.5×26×6cm 2021
스톡홀름 인근 숲속에 작업실을 얻은 크리스탈로바. 원래는 남편의 조부모 소유의 별장이던 곳이라 아이 셋의 육아와 작업을 병행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췄다고. 최근엔 스웨덴 북부의 소도시 셸레프테오(Skellefteå)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새로 들어설 복합 문화 공간의 파사드를 장식할 대형 텍스타일을 제작하고 있는데, 이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무려 2년만의 휴가를 떠날 계획. “나는 어떤 일을 끝냈을 때 새롭게 다가올 미지의 사건을, 그 완전한 자유를 사랑한다! 물론 끝을 보지 못하는 일도 더러 생기지만…, 새로운 작업의 단서를 찾아 나설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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