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산수, DNA로 그리다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사비나미술관 여름 특별전 / 조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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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산수> 거울, 멀티채널 비디오, 사운드 가변크기(부분) 12분 24초 2021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회화로 평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이남. 그의 개인전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6. 16~8. 31)가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렸다. DNA 데이터 코드를 점, 선, 면으로 구성해 산수화의 요소요소를 그린 영상 설치작품 21점을 선보인다.
이이남은 담양에서 성장했다. 그는 등굣길이면 마주쳤던 아름다운 남도의 자연과 고향의 풍경을 빼닮은 남종화를 보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이이남은 1997년 순천대 애니메이션학과 강의를 맡으면서 미디어아트를 처음 접했다. 붓이 아닌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움직임을 구현하는 모습에서 작가는 동양화의 핵심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발견했다. 이후 첫 미디어작업인 <4학년>(1998)을 시작으로 <신-인왕제색도>(2008), <모나리자 폐허>(2013) 등 실험적인 미디어작품을 발표하며 이이남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아티스트로 거듭난다.
그중에서도 이이남의 시그니처는 다빈치, 모네, 정선, 신윤복 등의 명화에 애니메이션 효과를 가미한 디지털 회화. 캔버스에 굳어 있던 물감은 작가의 손길을 거쳐 생동하는 빛의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원본 회화에서 정지된 대상은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겪거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등 시간성과 운동성을 지니게 된다. 작가가 고전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동시대미술을 다소 어렵게 느끼는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랐기 때문. “미술평론가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는 ‘관객이 작품 앞에 5분 만이라도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관객이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예술이다. 대중이 작품에 쉽게 접근하도록 익숙한 고전을 소재로 삼았다.”
이이남은 이번 전시에서 중국 당송대의 왕희맹, 곽희, 조선의 정선, 허백련 등의 작품을 차용했다. 작업을 위해 장장 2년 동안 고심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중국 체류 기간 겪었던 2주간의 격리는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때 온전한 자아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을 담은 당나라 시인 사공도의 「이십사시품」 속 구절이 그를 끌어당겼다. “이성을 중시하는 서구 모더니즘 사회가 바이러스에 멈췄다.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지, 인간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물음이 이어졌다.” 이이남은 자아 성찰의 경험을 DNA와 연결했다. DNA가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담았다는 점에서 정체성과 공통점이 있다고. 서울대생명과학연구소와 협업으로 추출한 작가의 DNA 데이터를 수묵의 붓놀림처럼 활용해 산수화의 대상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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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된 폭포> 고서, 싱글채널 비디오 680×200cm 2분 24초 2021
출품작은 이이남의 오리지널리티가 돋보이는 작품과 고전에 대한 재해석이 중점이 된 작품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작가의 고유한 미감이 돋보이는 작품을 살펴본다. <시(詩)가 된 폭포>(2021)는 총 5,300권의 서적으로 절벽을 쌓아 6.8미터 규모의 디지털 폭포를 구현했다. 고대 갑골문에서 추사의 세한도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책은 문명의 역사를 표현한다. 디지털 이미지로 만든 책과 달리 중간중간 설치된 실물의 책은 폭포에 물성을 부여하는 장치. 물길을 가로막는 가상과 실물의 상호작용으로 실재와 허구의 경계에 물음을 제기한다. 한편 물줄기는 한자와 알파벳과 같은 문자를 조밀하게 겹쳐 구성했다. 오랜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이어온 고매한 정신과 가치를 물의 흐름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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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는 인류> 거울, 오브제, 싱글채널 비디오 12분 24초 300×180cm 2021
<분열하는 인류>(2021)에는 벽 양면으로 서로 다른 화살이 꽂혀 있다. 한쪽엔 글자 ‘실(實)’이 화면에 재생되고, 다른 한쪽엔 전면 거울을 배치했다. ‘실’은 참된 본질의 상징. 화살을 맞고 부서지는 글자의 형태로 거짓이 난무하는 오늘날을 현상했다. 또한 거울 앞에 서면 화살은 관객의 신체를 관통하는 듯 착시를 일으킨다. 관객은 작품의 일부가 되어 혼란스러운 시대에 휩쓸린 자기 정체성 문제를 직면한다. 반대로 화살을 쏜 주체가 관객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중 구도는 온전한 ‘나’를 찾는 여정에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낸다.
다음은 이이남의 고전에 대한 깊이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살펴본다. <DNA 산수>(2021)는 『사공도시품첩』의 「웅혼」, 「충담」 그리고 왕희맹의 <천리강산도>를 DNA 데이터와 빛 신호로 재해석했다. 작가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표현한다. 원형 화면과 거울 사이 통로를 거닐며 관객은 산수는 물론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거울 구조로 평소에는 감각할 수 없던 내면의 자아와 조우하도록 유도했다. 반사된 상을 이용한 기법은 <반전된 산수>(2021)에서도 이어진다. 허백련의 <산수팔곡병풍>을 뒤집은 화면은 바닥의 수조에서만 정상적인 각도로 감상할 수 있다. 반사된 수면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은 눈에 보인다고 해서 모두 실재가 아님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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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들의 일어섬> 아크릴 거울에 C-프린트 각 120×80cm(부분) 2021
이이남이 고전회화를 탐구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명화에 인류가 오래전부터 추구해온 근원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 <뿌리들의 일어섬>(2021)에선 미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자아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작품은 작가와 가족의 DNA 데이터를 분석해 미의 근원은 물론 자신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시각적으로 탐색한다. 언뜻 추상화처럼 보이는 작품의 형상은 염기 서열의 종류인 아데닌, 티민, 구아닌, 사이토신을 의미하는 알파벳 A, T, G, C를 임의로 배열한 결과. 작가는 이 배열의 무한한 조합이 결국 인류 전체의 유기적 관계에 접근한다고 보았다.
관객과의 소통은 이이남의 작품 세계에서 큰 의미를 차지한다. 고전회화를 선택하고, 애니메이션으로 운동성을 부여하고, 화면을 설치물과 결속하는 지난한 노력은 모두 관객을 향해 있다. 작가의 작품을 보고 힘든 고민을 해결했다는 한 관객의 감상은 이이남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관객이 헛걸음하지 않고, 전시장에서 무언가 들고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작품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작은 이야기지만 많은 의미,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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