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포착, 일상이 반짝이는
화가 박진아, 국제갤러리 부산 개인전 <휴먼라이트> / 조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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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탠 04> 캔버스에 유채 130×180cm 2007
스냅 사진의 평범한 일상을 화폭 위 특별한 하루로 펼쳐내는 박진아. 그가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개인전 <휴먼라이트(Human Lights)>(8. 6~9. 12)를 개최했다. ‘인공조명’을 키워드로 회화 17점을 선보였다. 2007년에 그린 <문탠 04>를 기점으로 2021년 신작까지 대표작을 모은 이번 전시는 박진아의 작업 세계가 전개되는 양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인간의 빛’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출품작엔 인위적인 광원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공원의 야유, 산책, 전시 설치 현장, 무대 리허설, 사진 스튜디오, 도심 속 서핑 등 삶의 공간을 에워싸는 빛의 너울이 익숙함에 흘려보냈던 일상의 인상을 환기한다.
박진아는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당시 관심은 회화보다 설치미술에 있었다. 수많은 기성 화가의 존재, 의문스러운 회화의 동시대성, 설치 장르가 주를 이뤘던 1990년대 분위기에 부담을 느꼈다. 진지하게 회화에 임하게 된 시기는 첼시미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 석사 과정을 수학하면서부터. 교수가 과제를 부여하기보다 학생 스스로 정한 문제의식에 골몰하고, 적극적인 발표와 교류가 바탕이 된 학풍에서 박진아는 자신이 하고 싶은 회화 영역을 발견했다. 바로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상을 발견해 그리는 것. 그리고 회화라는 전통 장르가 지닌 무게감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가벼운 주제엔 가벼운 물성도 따랐다. 묵직한 유화보다는 아크릴을, 두께감 있는 마티에르보다는 얇은 레이어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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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정리 02> 리넨에 유채 130×162cm 2021
이번 전시에서 박진아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세 가지다. 첫 번째, 회화의 원본으로서 사진. 작가의 그림이 사진을 바탕으로 하는 이유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대상의 면면을 카메라가 포착해주기 때문이다. “사진은 고정된 장면이 아닌 앞뒤의 과정, 즉 흐르는 시간을 보여준다. 내가 보지 못한 것, 기억하지 않은 것이 사진에 담겨 있다.” 동작을 연속으로 인식하는 눈은 움직임의 부분을 관찰하지 못하지만, 1초당 수십 개의 프레임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부분을 포착할 수 있다. 박진아는 순간을 촬영하는 스냅 사진으로 인물의 동작이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동작과 동작 사이에 접근했다. <무대 정리 02>(2021)에는 무대를 정리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둘은 각각 의자와 보면대를 건드리고 있는데, 이 동작은 사물을 들어 올리는지 내려놓는지 구분할 수 없다. 즉 콘서트가 시작할 가능성과 종료될 가능성이 모두 그림에 포함돼 있다. 작가는 이 애매한 포즈를 ‘전환의 순간’이라 칭한다고. 딱 잘라 식별이 불가능한 어정쩡함에 변화의 가능성이 잠재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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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바닥 01> 캔버스에 유채 170×194cm 2015
그렇다면 작가는 왜 사진을 찍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미지를 다시 회화로 옮길까? 그는 두 매체가 이미지를 다루는 태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회화는 사진에 비해 이미지를 만드는 속도가 느리다. 사진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끝나지만, 회화는 물감을 말리는 시간까지 작업의 연속이다. 회화에는 이미지를 숙고하는 시간이 존재한다.” 작가는 같은 공간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겹치거나, 대상의 색상을 바꾸며 이미지가 주제에 밀접하도록 마지막까지 수정한다. 이 숙고의 시간 동안 우연히 찍은 사진이 의도를 함축한 회화로, 순간적인 포착이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 상황으로 변모해간다고 보았다. 사진 스튜디오의 모델 촬영 현장을 그린 <노란 바닥 01>(2015)은 원래 사진에서 무채색의 바닥이었지만 캔버스에선 샛노란 빛으로 칠했다. 삼삼오오 모여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문탠> 연작은 개별적으로 공원을 방문한 사람들의 사진을 겹쳐 일행처럼 드러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일상이다. 박진아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특별하지 않은 순간에 셔터를 누르고, 붓을 문질러 보통의 존재에 내재하는 특별함을 발견한다. 작품은 드라마틱한 사건, 대상 간 관계 등 구상회화라면 가질 법한 내용을 지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상황 연출 없이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사진을 찍었다. 그중 대부분은 노동의 상황을 담았다. 누군가 그림에 등장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할 때마다 작가는 답했다. “그럼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의도적이지 않은 동작을 그리고 싶은 작가에게, 노동은 타인의 시선에 무감한 채로 어떤 행동에 집중하는 매력적인 순간이다. 특히 작가는 관객이 작품을 보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이입하거나 닮은 사람을 찾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뭉개져 흐릿한 표면, 그곳에 숨은 이야기는 오히려 그 불투명함 때문에 관객이 침투할 여지를 마련해준다. 작가에게 작품은 “하나의 정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열려 있는 상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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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새밤 10> 리넨에 유채 130×205cm 2021
마지막 키워드는 인공조명. 빛은 박진아가 근작에서 적극적으로 다루는 주제지만 구상 단계부터 인공조명을 염두에 놓고 그리지는 않았다. 그는 2007년에 밤 풍경을 주로 묘사했는데 작품을 완성한 후에야 모든 작품에 조명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을 알았다. 전시에서 조명은 뚜렷한 형태 없이 명도 차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암시되거나, 형광등과 같은 기구 내지 비정형의 덩어리로 직접 표현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박진아는 스포트라이트가 배우를 빛내듯 어디든 존재하는 인공조명이 흔하디흔한 일상을 무대로 바꾼다고 생각했다. 월광욕을 뜻하는 <문탠 04>(2007)는 카메라 플래시라이트로 찍은 공원의 야유를 그렸다. 칠흑같이 검은 배경에서 섬광을 받아 빛나는 피사체는 연극의 한 장면처럼 관객을 집중시킨다. 한편 작가는 빛이 만드는 초현실적 분위기에도 주목했다. “빛은 때때로 영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 나는 초현실로 넘어가기 직전의 분위기를 선호한다.” 새해를 맞아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모습을 담은 <공원의 새밤 09>(2020)는 이러한 초현실적 분위기를 강조한 작품. 폭죽이 발산하는 빛이 공간처럼 표현됐다. 과장된 불꽃이 마치 환상 세계로 이동하는 차원 포털처럼 드러난다.
그림을 그린 지 20년이 넘었지만 박진아는 처음 붓을 잡을 때와 같이 여전히 스스로 묻는다. 회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야말로 작업을 지속하는 동력이자 영감이라 믿어서다. 그가 현재 구상 중인 다음 작업의 소재는 공장과 주방. 뜨겁고 소란스런 노동의 공간이 또 어떤 새로운 무대로 빛날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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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 1974년 출생.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전공 및 런던 첼시미술대학교 순수미술 석사 졸업. 합정지구(2018), 교보아트스페이스(2018), 하이트컬렉션(2014), 성곡미술관(2010) 등에서 개인전 개최.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인천아트플랫폼 2021), <회화와 서사>(원주 뮤지엄산 2020), <당신의 처음이 제가 아니기를>(SeMA창고 2019) 등 단체전 참여. 에르메스재단 미술상(2010) 최종 후보. 현재 서울 기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