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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밑동에굴을파다

2021/09/06

90년생 조각가 현남 개인전, 아뜰리에에르메스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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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전<무지개의밑동에굴을파다>전경

“야 이거 진짜 상징적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민혁이 준 수석을 보고 기우가 뱉은 첫마디다. 자연의 형상을 집으로 옮겨 언제든 감상하기 위한 장식물인 ‘수석’. 영화의 대사처럼, 자그마한 돌에 신비로운 만상이 응축되어 있는 수석은 그 자체로 대자연의 ‘상징’이다. 이 수석은 
축소된 경치, 즉 ‘축경’의 개념으로 완수된다. 축경을 조각의 언어로 사용하는 작가 현남이 개인전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7. 23~10.3 아뜰리에에르메스)를 열었다. 신작 조각과 사진작업 17개를 공개해 동시대의 풍경을 펼쳤다.
지난해 개인전 <축경론>(공간형&쉬프트)부터 본격적으로 ‘축경 조각’을 선보여온 작가. 조각가로서의 행보를 내딛고 있지만 회화과 출신이라는 의외의 히스토리가 있다. 작가에게 이전엔 어떤 작업을 했는지 물었고, 다시 한번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회화작업을 거의 안 했다. 그림에 흥미를 잃었달까. 대신 십 대부터 기타를 쳐왔던지라 인디 록 밴드를 꾸준히 했는데 어느 순간엔 록도 지겨워지더라. 오히려 음악보다 앰프나 이펙트 같은 사운드 장치가 만들어내는 ‘노이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전에는 주로 전자 부품을 의도적으로 고장내는 인스톨레이션을 했다.” 학부 졸업 후 작가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바로 첫 학기에 사물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피드백을 들었다고. 그렇게 시작된 게 ‘물질의 탐구’였다. 대신 현남은 사운드가 전기 신호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오작동을 일으키며 생기는 ‘노이즈’에 대한 흥미의 연장선에서 물질들의 ‘잡음’을 고민했다. 이는 ‘축경 조각’에도 반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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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율제로의길리슈트>혼합재료50×68×102cm2020

축경의 노이즈를 이해하기 위해 조각을 제작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짚어보자. 축경이 작업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이라면, 작가는 축경의 방법론으로 ‘채굴’을 수행한다. 이 아이디어는 가상 화폐를 주조해내는 비트코인의 ‘채굴’에서 얻었다. 손에 쥘 수도 없는 추상적인 물질이 사회의 단면을 반영하고 집단적인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굴 파기’라는 물리적 행위로 치환했다. 열 칼, 봉, 끌, 커터 칼, 쇠 파이프 등으로 폴리스티렌 덩어리에 구멍을 파 네거티브 보이드를 만든다. 그 안에 서브컬처를 연상시키는 컬러로 조색한 에폭시를 부어 넣고 마지막으로 표면의 폴리스티렌을 녹여 굳어 있는 덩어리를 꺼내는 식이다. 따라서 바깥의 껍데기가 녹기 전까진 완성된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마치 어디서 어떻게 얻어지는지 모호한 수수께끼의 가상 화폐처럼.
작가는 화학 물질을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한다. 일부러 한번에 많은 양의 에폭시를 부어 끓거나 깨지도록 만든다. 화학 물질의 오남용, 이것이 작가에게 있어 사운드를 충돌시키던 ‘노이즈’의 방법론인 것이다. “막상 조각을 하려고 보니 내게 아카데믹한 기술이 없었다. 처음엔 스티로폼을 깎고 다듬어봤는데 값싸고 편리하게 브론즈나 대리석을 대신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새로운 재료에 전통적인 기술을 써봤자 그 재료의 진짜 모습을 도출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과열되고, 부풀고, 깨지는 물질의 화학적 성질에 포커스를 맞췄다. 잘못 흘러나오는 노이즈처럼. 조각을 전공한 적이 없어서 원래 하던 걸 하게 되더라.” 자연물을 인위적으로  선택해 감상물이 되는 수석의 논리. 도리어 인공물을 자연스럽게 변형하는 작가는 자연과 인공의 성질과 역할을 도치해 동시대의 축경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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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축(괴뢰사)혼합재료가변크기2021

한편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생물’의 흔적이 발견되는 <공축(괴뢰사)>. 조각의 구멍에서 뻗어 나온 와이어 끝에 거미, 파리, 풍뎅이와 반짝이는 비스무트 결정체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작가는 일산 외곽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종종 집으로 사용하는 벌레들이 풍경의 ‘사용자’처럼 느껴졌다고. 이들은 인공의 풍경을 점유하는 실거주자인 셈이다. ‘괴뢰사’라는 부제가 꼭두각시를 놀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점에서, 이 생물들은 주어진 풍경, 도시, 건축, 하물며 집 따위의 주변 환경을 벗어나기 어려운 동시대인을 표상한다. 축경 조각의 좌대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다. 수석 문화에선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자연석을 최고로 치는데, 이때 인간이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라면, 평범한 돌을 좌대에 얹어 심미적 대상으로 승격시키는 일이다. 하여 작품의 좌대를 들여다보면 아치형 굴, 계단 등 작가의 손맛이 드러나는 건축적 요소가 조각되어 있다. 
인물조각, 정물조각은 익숙해도 풍경조각은 생소하다. 미술에서 ‘풍경’은 주로 둘둘 펼쳐내는 산수화나 기껏해야 디오라마 등으로 표현돼왔다. 현남은 왜 하필 풍경을 조각으로 구현할까? “조각에서 풍경이 다뤄지지 않은 이유는 조각이 구체적인 매체이기 때문이다. 실제 공간에 유형의 재료로 놓이니 회화처럼 지금 여기가 아닌 환영을 만들기 힘들다. 하지만 수석에서는 ‘축경’이라는 개념 덕에 3차원 사물이 미지의 풍경으로 뒤바뀐다. 물리적이면서도 환영을 자아내는 수석의 양면적인 성질과 긴장감이 중요했다.” 회화적 환영은 눈앞의 물질을 보면서 다른 어딘가로 날아가게 만드는 정신의 순간 이동 포트키다. 그런 점에서 축경 시리즈는 추상회화의 효과를 취한 가상 풍경의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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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덫)>혼합재료58×44×48cm2021

현남은 조각과 사진작업을 함께 전시한다. <고딕>이 기지국과 십자가가 같이 있는 풍경을 원경에서 포착했다면, <위성사진>은 직접 만든 비스무트 광물을 근접 촬영한 결과다. 전자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전파하지만 혐오 시설로 기피되는 기지국을 고딕 양식의 첨탑에 유비했다. 공동체의 문화, 법, 질서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사회적 심벌로서의 기지국이다. 후자에서는 직접 제작한 비스무트를 하나의 세계로 상정해 이를 확대 관찰했다. 멀리서 본 실제 풍경 속 상징과 가까이서 본 상상 속 도시 풍경. 사진에는 현남이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거리감이 내포돼 있다. 그는 조각을 제작하는 데 사용했던 자신의 시점을 사진으로 해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체를 알기 어려운 현실이다. 내가 감각할 수 없는, 저 너머에서 작동하는 일을 의심하고 상상한다. 나는 조각으로 내가 경험하는 세계를 재구성해 유령이나 신기루 같은 오늘날의 핵심과 본질을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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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1990년출생.홍익대학교회화과졸업,서울과학기술대학교조형예술 석사수료.인스턴트루프(2021),공간형&쉬프트(2020)에서개인전개최.<기하적 유기학>(도록2020),<얼굴들>(서울과학기술대학교미술관2019),<희지스하우스(3×3)>(시청각2018),<LoopedLayers,B1-F3>(아카이브봄2017),<샤례이드:스피드게임>(서울과학기술대학교미술관2017),<shortstorylong-장마>(스페이스윌링앤딜링2015)단체전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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