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로 그리는 디스토피아
BB&M갤러리, 개관전으로 이불 6년 만의 갤러리 개인전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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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개인전 전경 2021 BB&M갤러리
코흘리개 시절, 할머니 방은 내 인생 최초의 아지트였다. 마실 나간 할머니가 방을 비우면, 잠옷 차림으로 몰래 잠입해 크디큰 장롱을 열고 층층이 쌓인 ‘이불 암벽’에 올라 정상에서 곤히 잠들곤 했다. 화장품과 나프탈렌, 곰삭은 침구와 할머니의 낡은 세포 냄새가 뒤섞인 장롱은 나만의 애착 요람이었다. 잠에서 깨면 할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방바닥에 누워 장롱 문에 펼쳐진 반짝이는 세계를 구경했다. 날갯짓하는 학, 삐죽삐죽 소나무, 낯선 모양의 집, 무리 지어 노는 사슴,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은 보랏빛인지 옥빛인지 묘했고, 손끝으로 문지르면 올록볼록했다. 이들의 이름이 ‘자개’라는 건 머리가 좀 더 큰 후에 알았다.
지난 10월 15일, BB&M갤러리 개관전으로 오픈한 이불 개인전(10. 15~11. 27)은 이 자개로 가득했다. 이불은 현대 사회를 성찰하는 날 선 주제 의식과 독보적인 미감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아왔다. 그의 예술관은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부모와 이에 따른 연좌제적 굴레 등 사적 기억에서 출발한다. 1990년대 후반에는 여성 신체의 억압을 표현한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시도했지만 결국 좌절된 근대적 이상주의를 알레고리화한 건축적 스케일의 조각과 설치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는 글로벌 아티스트로서 지난 몇 년간 대규모 국제 회고전으로 분주했던 이불의 최신작을 소개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올해 3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형 개인전이 개최됐지만, 당시에는 작가의 초기 활동을 조명하는 1987년부터 10년간의 조각, 퍼포먼스작업이 중심이었다. 반면, 이번 개인전은 이불이 최근 몰두하고 있는 ‘입체 회화’를 한자리에 모아 공개하는 국내 최초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층으로 나뉜 화이트 큐브 전시장에는 2021년 한 해 동안 제작한 회화작품 12점, 그리고 회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과거 조각작품 2점이 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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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듀 CI> 나무 패널에 자개, 아크릴릭,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 163×113×6.5cm 2021
그간 국내의 여러 전시에서 만나온 이불 작업을 떠올려보면 갤러리에 펼쳐진 광경이 다소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차가운 스틸과 거울, 축 늘어지는 전선, 그로테스크한 괴물 등 익숙한 형상과는 사뭇 다른, ‘화사하고 예쁜’ 페인팅이 관객을 반겼다. 해외 메이저 갤러리와 아트페어에서 한두 점씩 소개되었던 <퍼듀(Perdu)> 시리즈다. “<퍼듀>는 2017년 뉴욕 개인전에 선보인 이후 꾸준히 제작하고 발표했지만, 국내에선 대형 조각 위주로 전시하면서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BB&M갤러리 개관전이 좋은 기회가 됐다.”
나무 판에 아크릴 페인트, 자개, 돌가루를 여러 겹 축적하고, 갈아내고, 다시 칠하는 노동을 수십 번 반복해 만든 <퍼듀>는 6.5cm의 두께를 지녀 무겁고 거대한 석판으로 느껴진다. 전시에는 유일하게 표면을 갈아내지 않은 작품 1점도 함께 배치하면서 연마 과정이 결과물에 어떤 물성의 차이를 일으키는지 비교하도록 했다. <퍼듀> 연작은 주홍, 파랑, 하양, 검정, 노랑, 에메랄드 등 짙은 원색과 은은한 파스텔 톤이 다양하게 교차하면서 식물의 잎맥이나 세포처럼 기이한 모습을 이루고, 관객이 가까이 다가설수록 자그마한 자개들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물속에서 공기 방울이 부글거리는 순간 같기도, 강물이 아름다운 윤슬을 머금은 장면 같기도 하다.
<퍼듀>는 이불의 과거 조각들에 그 출생의 기원을 둔다. 군사 독재, 경제 발전과 세계화, 경직된 남북 관계로 요약되는 1970~80년대 한국에서 청년기를 보낸 이불은 공상 과학 영화에서 볼 법한 사이보그 신체와 유기체적 몸을 지닌 조각 및 설치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오브제는 젠더, 테크놀로지, 인종과 계급 등의 주제를 독창적으로 주조했다고 평가받는다. <퍼듀>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입체로 실현해 온 ‘유기체와 기계의 하이브리드’를 평면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입체로 추상적인 형태 자체에 집중했다면, 평면은 여기에 색채 표현까지 포괄했다. “유기적 구조를 조각이 아니라 평면에서도 구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조각을 제작하기에 앞서 드로잉을 그리는데, 이 과정을 발전시켜 회화와 조각의 중간 단계인 입체 회화로 완성했다. 어디까지 확장하고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굉장히 흥미롭다.”
밝은 연분홍빛이 매력적인 <퍼듀 XCV>는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나무를 떠올린다. “올봄에 벚꽃과 매화가 엄청나게 피었다. 코로나19로 집에만 있는데, 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더라. 자연의 색을 작품에 반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퍼듀 XCV> 앞에는 2004년작 바이오모픽(biomorphic) 조각 <스틸(Still)>이 나란히 놓였다. <스틸>은 생물과 기계 사이 유기적 구조를 표현한 작가의 대표 조각 시리즈 <사이보그>와 <아나그램>의 전환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퍼듀 XCV>의 비정형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는 <스틸>의 형태를 확대, 변주한 것으로, 둘은 시각적 모티프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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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드를 위한 스터디(Study for Aubade)> 스틸 캐스팅(철거된 DMZ 체크포인트에서 수집한 철재), 글라스 비즈, PCB 기판 외 혼합재료 70×70×200cm 2019
전시장 안쪽 작은 방에는 <오바드를 위한 스터디(Study for Aubade)>와 <퍼듀 CI>가 매칭됐다. 높이 20cm의 <오바드를 위한 스터디>는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약 4m 높이의 <오바드(Aubade) V>를 5분의 1일 규모로 축소한 소품이다. 작가는 DMZ 검문소의 감시 초소가 철거되면서 사라질 뻔한 철재를 확보해 에펠탑이나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위한 모형> 등의 근대적 기념비를 상기시키는 입체물을 구축하고, 한국의 분단 현실을 향한 메시지를 담았다. <오바드를 위한 스터디>는 스틸 캐스팅으로 제작돼 무채색이 두드러지지만, 이 작품에서 배태된 <퍼듀 CI>는 강렬한 노랑, 분홍, 보라색 옷을 갖춰 입었다. 드높게 치솟은 직선과 오염된 듯 진보랏빛 덩어리가 뭉친 형상은 이불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인 ‘실패한 유토피아’를 닮아 있다. 황홀하고 숭고하지만, 금방이라도 다급한 사건이 터질 것 같이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평면작품 연작인 <무제 (취약할 의향-벨벳)>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미학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부드러운 실크 벨벳에 날카로운 자개 조각과 유리 파편, 아크릴판, PVC판 등을 이어 붙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하고 충돌하는 공간을 콜라주했다. 핀셋으로 재료를 하나하나 직조하는 세밀한 공정을 거쳤다. 콜라주 사진은 작가의 지난 개인전 이미지를 활용했는데, 그중 <무제 (취약할 의향-벨벳 #15)>는 지난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진 러시아 첫 개인전과 연계한다. 당시 전시에서는 거울, 스테인리스 스틸, 금속 등 빛을 반사하는 재료로 이상 실현의 도전과 실패를 시각화했다. 거울과 작은 전구를 바닥에 깔아 조각적으로 재구축한 <태양의 도시 II>, 힌덴부르크 비행선 폭발 사건을 모티프로 제작한 <취약할 의향>으로 유토피아를 향한 인류의 욕망을 비췄다. 장엄하고도 덧없는 건축과 풍경의 앙상블로 건설한 유토피아이자 동시대의 분열된 거울상이다.
자개만큼 입체적이면서 평면적인 오브제가 또 있을까? 이는 조개껍데기 본연의 부피 때문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자개의 ‘피부’ 때문이다. 피부는 납작하지만 꼬집거나 비트는 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고 볼륨감이 생긴다. 연약하지만 내장을 보호할 만큼 강하고, 대상의 사이즈에 따라 유연하게 늘어나고 줄어들기도 한다. 이불의 자개도 마찬가지다. 자개 회화는 관객이 이동하는 움직임에 따라 전시장 조명을 반사하며 입체감을 발산한다. 한장 한장의 조각은 가볍고 얇지만, 이들이 퇴적층처럼 쌓여 대지를 창조하고 탑을 세우며, 웅장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비록 그곳이 어릴 적 할머니 방에서 본 장롱의 평화로운 세계처럼 이상향의 허망한 그림자일지라도, 혹은 꽃피우지 못한 낙원일지라도.
한편, BB&M갤러리는 2009년 설립한 아트컨설팅 회사 BB&M이 성북동에 개관한 전시 공간이다. 아트선재센터 전시부장, 광주비엔날레 전시디렉터를 역임한 제임스 리와 PKM갤러리, 갤러리바톤의 디렉터로 활동한 허시영이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이불, 배영환, 김희천이 전속 작가로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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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 1964년 영주 출생. 홍익대 조소과 졸업. 서울시립미술관(2021),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네지중앙전시홀(2020), 리만머핀 뉴욕(2019), 베를린 마틴그로피우스바우(2018), 런던 헤이워드갤러리(2018), 타데우스로팍 파리(2017), 파리 팔레드도쿄(2015) 등에서 개인전 개최. 광주비엔날레(2021), 베니스비엔날레(2019), 방콕아트비엔날레 (2018) 등의 대규모 국제 예술제에 참여. 호암예술상(2019),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장(2016), 광주비엔날레 눈 예술상(2014)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