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콜라주,현실의연금술

2021/11/09

리만머핀 서울, 신표현주의 대가 데이비드 살레 개인전 / 조재연 기자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f22beea21f12934f6b46d96ffe673e722f33a016-500x659.jpg

<TreeofLife#26>리넨에아크릴릭,유채170.2×127cm2021

미국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데이비드 살레.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지만, 살레의 화면에는 영화, 만화 캐릭터, 광고 포스터, 상품 로고, 포르노그래피 등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이미지가 가득하다. 작가는 대중문화 요소를 미술사적 레퍼런스와 결합해 왔다. 대중문화의 차용은 그가 속한 ‘픽처스 세대’의 공통적인 작업 방식. 픽처스 세대는 미디어 문화를 비판했던 1970년대 아티스트 그룹이다. 신디 셔먼, 바바라 크루거, 루이스 라우러, 리처드 프린스, 로버트 롱고, 잭 골드스타인, 세리 레빈, 트로이 브라운투흐, 마이클 즈왁 등이 이 그룹에서 살레와 함께 활동했다. 픽처스 세대의 작품 세계는, 독자가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체하고 구성하기를 제안했던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개념 ‘저자의 죽음’에 기반한다. 픽처스 세대는 저자의 의도를 변주하거나 원본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미디어의 소비주의를 겨냥했다.
사진 매체에 집중했던 대부분의 픽처스 세대 작가와는 달리, 살레는 콜라주 기법을 회화에 도입한다. 화면에 헝겊, 비닐, 타일, 조각, 상표 등 오브제를 부착하는 기존 콜라주 방식을 취하는 대신, 차용하고 싶은 이미지를 직접 그렸다. “현실 세계는 일관적이지 않다. 콜라주는 복잡하고 모순된 현실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가 활동할 당시 미국과 유럽 아트씬의 주류 미술은 추상화였다. 그러나 살레는 추상화가 더 이상 새롭지 않으며, 급변하는 세상을 재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추상미술이 표현하는 정지와 반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통제 불가능한 곳이다. 이를 따라잡기 위해서 예술은 변화해야 했다.” 살레는 콜라주가 창출하는 과장된 구상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과거 구상회화에서는 찾을 수 없던 독특한 소재와 격정적인 브러시 스트로크로 미국식 신표현주의 운동을 이어갔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c30333d7277ea319bab33b60d36aac80fc8cb8af-500x677.jpg

<TreeofLife#49>리넨에유채96.5×71.1cm2021

살레는 미국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어려서부터 학급 수업보다 학교 밖 미술을 배우는 데 흥미를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예술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종군 기자로 태평양전쟁을 촬영했던 부친은 휴일마다 유화를 그리곤 했다. 부친은 끝내 상업 화가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살레는 어깨너머로 사진과 유화를 접하며 미적 감각을 키웠다. 이후 화가가 되고자 캘리포니아예술학교에 진학해 존 발데사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살레는 여전히 미술수업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에게 “학교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보다 어떻게 평가하는지만 가르쳐주었다.” 오히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회화가 아닌 다른 매체에 더 관심을 갖고 영화, 공연, 사진, 텍스트 등 다양한 미디어를 실험하며 매체론을 연구했다. 살레는 학부를 졸업하고 2년이 흐른 뒤에야 회화로 돌아왔다.
작가는 그 방황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삶에선 중요한 것이 늦게 나타날 때도 있다. 나는 많은 길을 돌아왔다. 실패한 그림이더라도 화가에게는 그림을 끝까지 완성할 의무가 있듯, 만약 실패하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살레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작업 세계를 펼쳐갔다. 아방가르드 극작가 리처드 포먼이 연출한 <The Birth of a Poet>(1985) 무대 감독, 현대 무용가 캐롤 아미티지의 의상 디자이너,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을 맡은 영화 <Search and Destroy>(1995) 감독, 『아트포럼』 『더파리리뷰』 『모던페인터스』 『아트인아메리카』의 기고자, 비평서 『How to See』의 저자 등….  작가는 자신이 다른 장르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매체를 넘나드는 현재의 화풍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리만머핀 서울에서 그의 개인전 <현실의 연금술>(10. 7~11. 13)이 열렸다. 카툰과 창세기를 콜라주한 <Tree of Life> 시리즈 7점을 선보였다. 작가는 팬데믹 기간 동안 외부 활동을 중지하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다. 작가에게 이번 작품은 현재 상황을 대변하는 일종의 ‘전염병’ 연작이기도. 연금술은 중세 시기 유행했던, 여러 금속의 화학 작용을 이용해 금을 만드는 상상 속 기술이다. 살레는 전시에서 이질적인 대상을 콜라주해 현실을 ‘연금’했다. 언쟁하는 남녀, 땅에 묻힌 사다리, 앙상한 나무를 갉아 먹는 벌레 등 상징적인 이미지로 사회 구조의 다면을 재현했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b6ab5bdc3a7dfce892f5c638410891d6943ddd8a-500x620.jpg

<TreeofLife#5>리넨에유채,아크릴릭231.1×188cm2020

이번 전시는 살레가 차용한 대상에 따라 4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피터 아르노의 카툰. 피터 아르노는 1920년대 대공황 시기 잡지 『더 뉴요커』의 간판스타였던 만화가다. 아르노는 순진한 생김새와 반대로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인물을 내세운 카툰으로, 당시 뉴욕 엘리트 계층의 위선을 풍자했다. 살레는 이 아르노의 캐릭터를 젠더 갈등을 드러내는 소재로 차용한다. 작가가 남성을 그린 것은 40년 만의 일이다. “아르노의 그림을 만나기 전까지 남성은 나에게 재현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르노의 캐릭터를 콜라주하면서 남성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화면을 2등분한 나무를 기준으로 남녀는 서로 떨어져 위치한다. 두 인물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인물의 순진한 표정은 상대를 약 올리듯 불통의 상황을 더욱 강조한다. 작가에게 남성과 여성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벽에 가로막혀 불화를 겪는 관계다. 한편 아르노의 카툰은 이미지 한 컷과 그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으로 구성되지만, 살레는 이번 작품에서 텍스트를 생략했다. 텍스트는 그림을 보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고. 관객은 비어있는 텍스트를 보면서 그림에 적합한 대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살레가 두 번째로 차용한 대상은 성경이다. 남녀 사이를 가로막은 나무의 정체는 바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생명수.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선악과가 이 나무의 열매다. 흑백으로 처리된 인물과 달리 생명의 나무는 다양한 색을 지니고 있다. 생명수는 기독교뿐 아니라 서양의 다양한 철학과 신화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작가는 성경을 차용함으로써 화폭에 개인적인 사건을 넘어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부여를 유도했다.
한편 나뭇잎을 갉아 먹는 벌레는 1950~60년대 반공주의 선전물에서 가져왔다. 당시 미국 내무부는 공산 국가의 빈곤을 과장해서 국민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을 심었다. 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는 공산화가 농민 계층에 어떤 일을 야기할지 보여주는 우화적 묘사. 마지막으로 나무의 뿌리가 위치한 그림 하단부는 지층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지반에 묻혀있는 사다리, 얽힌 뿌리, 지렁이, 인간의 신체 등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 혹은 작품의 무의식을 의미한다. 특히 살레는 무의식에 접근하기 위해 하단부 배경만 예외적으로 추상회화의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그렸다. 작가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드러내고 싶었다고.
피터 아르노의 카툰, 성경 속 생명수, 반공주의 선전물, 지층 이미지, 이렇게 총 네 가지의 콜라주는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작가가 의도한 장치다. 작가는 이미지가 서로 연관 없는 배경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일, 예상하지 못한 상황, 비이성적인 것. 예술은 논리보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아쇠다.” 살레는 관객이 정해진 결말을 따라가지 않고, 자유롭게 이미지를 연결하고 조합해 각자의 결말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1229c008e59867941ea1491c7824c115b9a8297b-500x750.jpg

데이비드 살레 / 1952년 미국 오클라호마 출생.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학사 및 석사 졸업. 미국 댈러스컨템퍼러리(2015), 시카고아트클럽(2014),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2012), 멕시코 몬테레이현대미술관(2000), 오스트리아 빈현대미술관 (2000), 이탈리아 토리노리볼리현대미술관(2000) 등에서 개인전 개최.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2024.11.01~)
[만료]고흥군청(2024.11.01~2025.01.08)
[만료]한솔제지(2024.11.13~2025.01.08)
아트프라이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