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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의변신은무죄!

2022/01/06

에르메스재단, 공방 아티스트 레지던시 10주년 기념전 <전이의 형태>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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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뷔르가르<무슨일이생기든>가죽,나무,스테인리스스틸,수지,유리섬유가변크기2016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죽 제품이 가득 진열된 메종에르메스도산파크. 그 아래층의 아뜰리에에르메스로 들어가면 작은 잉어 한 마리가 지느러미를 팔랑팔랑 움직이며 흥얼거린다. “I will survive, I will survive, hey, hey~♬” 우리에겐 진주의 <난 괜찮아>로 더 익숙한,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멜로디를 따라 주둥이를 뻐끔대는 이 잉어는 미끄러운 비늘 대신 가죽을 입고 금발 가발을 쓴 기괴한 모습이다. 프랑스 작가 베랑제르 에냉이 만든 작가의 초상이자 <전이의 형태>전 출품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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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랑제르에냉<잉어초상화-자포자기한작가의초상화>가죽,마우스빌리베스오브제45×25×15cm2020

에르메스재단은 2010년부터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운영해 매년 에르메스 공방과 밀접하게 협업할 작가 4인을 선발한다. 주세페 페노네, 리처드 디콘, 장-미셸 알베롤라 등 세계적인 작가의 멘토링을 받으며 크리스털, 가죽, 은, 실크 같은 진귀한 재료와 장인의 숙련된 기술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작가에게 새로운 예술적 탐구의 가능성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장인 또한 기존의 작업과는 색다른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더욱 연마하는 혜택을 받는다. 오늘날 레지던시를 개최하는 기관은 많지만, 에르메스는 장인의 공방이라는 매혹적인 공간에서 창작할 기회를 제공해 더욱 인기를 끈다. 특히 입주 초기에는 실크, 가죽, 크리스털, 은세공 공방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장인의 활동을 세심히 관찰하는데, 작가들은 공방 탐방 후 작업 결과물을 내보이라는 재촉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작업을 시작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에 충분히 적응한 다음 자유롭게 영감을 떠올리도록 권유한다. 이후 창작할 시기가 되면 장인의 동의를 얻어 공방 한가운데에서 작품을 제작하거나 공방 전체를 탈바꿈하기도 한다. 작가와 장인이 진정으로 교감하고 협업하는 순간이다.
레지던시가 종료되면 아시아와 프랑스에서 순차적으로 결과 보고전이 개최된다. 2013년 파리 팔레드도쿄에서 선보인 <컨덴세이션>전은 물질의 변형을 주제로 작가와 장인을 하나로 연결하는 연금술을 강조했고, 2018~19년 <쉬지 않는 손>전은 장인과 작가의 친밀한 교류에 집중했다. 지난해 12월 10일부터 올해 1월 30일까지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열리는 <전이의 형태>는 에르메스 공방 아티스트 레지던시 10주년 기념전. 오는 4월까지 도쿄 르포럼과 프랑스 팡탱 마가쟁제네로를 순회하는 일정이다. 전시 제목은 정신분석학 용어를 차용했다. “전이(transference)는 어린 시절 기저의 욕구가 현재의 만남을 통해 현실화되는 기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모든 복잡한 상호 작용은 작가와 장인의 세계가 만날 때 이루어진다. 완벽한 형태를 추구하는 행위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행위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모든 행동, 모든 관점뿐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모든 ‘실패’를 아우르는 것이다.”(가엘 샤르보 공동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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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피캉데<나에게육신이무엇이든>가죽,나무180×180cm2015

에르메스 레지던시의 10년을 재조명하는 이번 전시에는 총 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루시 피캉데, 이오 뷔르가르, 아나스타지아 두카, 세바스티앙 구쥐, 바실리 살피스티, 유신 유 창, 베랑제르 에냉 등 2014년부터 최근까지 레지던시에 입주한 작가가 주인공. 에르메스 공방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가죽’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이 전시장을 채웠다. 먼저 피캉데는 우로보로스를 닮은 원형 평면작품 <나에게 육신이 무엇이든>을 출품했다. 알록달록한 가죽을 ‘아쁠라’(붓 터치 없이 납작하게 그린 페인팅) 기법처럼 이어 붙여 서로를 품은 여인과 악어를 형상화했다. 긴장 상태에서도 평형을 이루는 상태 또는 극과 극이 구분되지 않는 이미지를 상징한다. 뷔르가르는 가죽의 부피감을 연구해 바위를 닮은 오브제 설치 <무슨 일이 생기든>을 완성했고, 두카는 슈즈 공장에서 레지던시를 경험하면서 그곳 직원 개개인의 취향과 선호도를 반영한 슈즈 컬렉션 프로젝트 <르 콜랑>을 진행했다. 구쥐는 석양을 배경으로 서있는 야자수를 떠올리며 검은색 양가죽, 철, 나무로 <역광, 야자수>를 구현했다. 작품 하단의 밑면을 형광 주황색으로 칠하면서 야자수가 공간에 부유하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켰다. 회화작업을 해온 살피스티는 가죽에 나타나는 ‘회화성’를 탐구하면서 재료 본연의 무늬를 조형 요소 삼은 설치 <베레니케가 된 복스>를 설치했고, 흙 양모 리넨 나무 석탄 등 재료의 형태를 고찰하는 창은 지지대 없이도 곧은 모양을 유지하는 커다란 가죽 조각 <시도> 시리즈를 구현했다. 마지막으로 에냉은 파티가 끝난 후의 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설치물과, 센서가 달려 사람이 다가오면 움직이는 물고기 모형 <잉어 초상화-자포자기한 작가의 초상화>로 현대인의 허무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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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구쥐<역광,야자수>가죽,나무,310×230×210cm2019

아뜰리에에르메스 전시 종료 후 르포럼에서 이어질 전시에는 각각 3명의 레지던시 작가와 멘토가 합류한다. 이들은 자신의 작품을 해체하고 또 다른 모습으로 함께 재조합하면서 레지던시 멘토와 멘티의 깊은 교류 관계를 드러낸다. 또한 마가쟁제네로에서는 시노그래피 개념을 적용해 작품을 보다 다채로운 관점에서 펼쳐 보일 예정. 예술가의 통통 튀는 상상력과 장인의 탁월한 노하우, 재단의 통 큰 지원 삼박자를 고루 갖춘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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