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늘에도 꽃은 핀다
국제갤러리 부산, 문성식 ‘유화 드로잉’ 신작 개인전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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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드 엔딩> 캔버스에 젯소, 연필, 아크릴 과슈 41×32cm 2021
장면 하나. 벚꽃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어느 거리, 앞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 남자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이 가족인지 연인인지, 혹은 그저 우연히 같은 길을 걷는 남남인지 정확한 정보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림의 제목은 <새드 엔딩>. 장면 둘. 인적 드문 새벽의 골목길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며 들리지 않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설득이라도 하듯 자신의 두 손을 애절하게 맞잡는다(<설득>). 장면 셋. 인자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튼 대형 석불상. 그보다 20배는 작은 사람도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불상을 향해 거듭 머리를 숙여 기도한다(<기도>).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자신의 운명을 돌덩어리에라도 의탁하듯이….
우리는 독립된 세 장면에 ‘상상’이라는 풀을 발라 머릿속 각본을 짜본다. 두 사람은 분명 커플이었을 테고, 어떤 사정 때문에 여자가 이별을 통보했지만 이를 거부한 남자가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라는 대사를 날리며 붙잡았을 테고, 그럼에도 재결합하지 못해 상심한 남자가 홀로 여행이라도 떠났을 거라는, 어디서 많이 본 법한 이야기를. 하지만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아니, 삶에 진실이란 게 있기는 할까? 내일 만나자고 약속한 친구가 하룻밤 사이 비명횡사하고, 어제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애인이 오늘은 날 배신한 악당이 되고, 학창 시절 죽마고우가 전 재산을 털어가는 세상에서 합리적인 인과 관계로 이루어진 진실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갑자기, 어쩌다, 애꿎게 덮쳐 오므로 내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일 만한 일련의 서사는 드라마에만 존재하는지도, 삶은 인간의 상상으로 불완전하게 이어지는 장면의 연속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중 몇 개의 장면은 문성식 개인전 <Life 삶>(1. 21~3. 13 국제갤러리 부산)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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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식 개인전 <Life 삶> 전경 2022 국제갤러리 부산
이번 전시는 2019년 국제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과 연장선에 있는 작품 100여 점으로 구성됐다. 그 당시 꽃이 피고 지는 정원, 동물과 곤충의 하루, 혼자 또는 여럿이 살아가는 일상을 주제로 그린 ‘유화 드로잉’을 기법적으로 더욱 심화한 신작들이다. 문성식은 학생 때부터 소박한 인간 생애를 세밀한 필치로 그린 연필 드로잉에 주력했지만, 점차 아크릴과 구아슈로 작업 언어를 확장해 나갔다. 유화 드로잉은 2017년 부산에 정착하면서부터 실험한 표현법. 캔버스에 오일을 두텁게 바른 다음,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 표면을 연필로 긁어 부조와 같은 효과를 낸다. 작가 특유의 오밀조밀한 드로잉 선을 고수하면서도 유화의 마티에르를 새롭게 덧입혀 그림의 ‘보는 맛’을 풍부하게 이끌었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 대부분은 A4 용지 정도의 크기로 다소 아담하다. 갤러리의 가장 긴 벽에는 총 60점의 그림이 두 줄로 길게 걸렸는데,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한 장면씩 근경과 원경을 교차하며 화면에 담겨 관람 순서에 따라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내러티브를 상상하도록 유도했다. 부둥켜안고 입 맞추는 연인, 곤히 잠든 고양이, 살이 통통하게 찐 열매들, 풀숲에서 숯불 바비큐를 나눠 먹는 가족, 포대기에 아이를 싸 업고 동네 마실 나온 할머니, 엄마의 얼굴…. 어쩌면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문제없는 세상의 이면이지만, 문성식은 모두가 주목하는 하이라이트 샷이 아니라 좁쌀 같은 기억의 파편을 다정하게 수집한다. 이들은 우리 삶의 장면과 장면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상상의 풀이자, 명장면을 더욱 빛내주는 존재의 뿌리다. 그가 그린 매화, 목련, 나리꽃, 도라지꽃, 배나무, 사과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 그 외에 수많은 이름 모를 식물은 황폐한 땅을 개벽시키는 씨앗의 잠재력을 일깨운다.
문성식은 아직 대학원생이던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최연소 작가로 참가하면서 미술계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막 싹을 트기 시작한 식물에 주변의 기대감이 홍수처럼 넘치자,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소진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엔날레 이후 어린애가 짊어진 부담감이 너무 컸다. 기회가 생기면 가만있을 수야 없지만, 작가에게는 생존이 달린 일인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활동 초기부터 대미지를 크게 입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었다.” 5년 전 부산행을 선택한 계기도 슬럼프를 타개해 보려는 ‘이판사판’의 결단이었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한 점 한 점 정성껏 쥐어 짜내기보다는 창작 자체를 목표로 삼자고, 딱 2년만 더 해보자고 자신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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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식 개인전 <Life 삶> 전경 2022 국제갤러리 부산
스스로 갉아먹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마음의 밸런스를 찾으니, 그림이 즐거웠던 시기의 작업이 다시 보였다. “이제 모든 걸 포기하거나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낙담했을 때, 아주 맨 처음의 드로잉이 떠올랐다.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그리면 문성식이 그린 사람, 또 이건 문성식이 그린 것 같은 집…. 선을 긋는 어떤 호흡과 냄새, 그 드로잉이 나의 조형적 에센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여기에 이전과 다른 재료와 방법론을 끌어들이는 기법을 고안했다.” 코어의 힘에서 실마리를 얻은 작가는 ‘에센스로 돌파하기’ 전략을 세워 이집트와 그리스 예술, 터키의 세필화, 모스크 패턴, 일본화, 정선과 김홍도, 조선시대 책가도 등 전통미술을 연구했다. 2019년 개인전에서 공개한 <그냥 삶>은 연필 드로잉과 페인팅을 새롭게 합치한 대형 장미 그림 연작이다. 3년간 장미꽃에 애정을 갖고 키우면서 꽃의 생장과 벌레, 나비, 새 등 자연물의 관계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이를 회화에 담아냈다. “꽃 그림은 내가 생각한 세계의 축소판을 상징한다. 이제는 재현할 수 없는 과거는 그리지 말고, 지금 보이는 것들을 그리자고 다짐했다.” 누군가 활짝 핀 꽃잎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문성식은 꽃이 만개하기까지의 기묘하고 더러운 ‘그냥 삶’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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