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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을기억하는…

2022/03/21

타데우스로팍, 영국 화가 제이슨 마틴 한국 첫 개인전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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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MixedWhite/UltramarineViolet)>알루미늄에유채178×178×11cm2021

영국 현대미술을 전 세계로 알린 전설적인 전시 <Sensation: Young British Artists from the Saatchi Collection>(런던 로얄아카데미 1997). 이 전시에서 yBa라는 별칭과 함께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얻었던 작가 대다수는 파격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그중에도 회화 표면 안팎의 2차원과 3차원을 고민하며, 보수적인 영국의 기성 미술계에서 흔히 볼 법했던 가로 줄무늬의 올오버 추상회화를 제작하는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이슨 마틴이다.
마틴의 한국 첫 개인전 <수렴(Convergence)>(2. 24~4. 16)이 타데우스로팍 서울에서 열렸다. 알루미늄판을 캔버스 삼은 회화 11점과 수채화 물감을 활용한 드로잉 2점을 발표했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기본 도구인 붓으로 미세한 결을 살린 대형 회화 신작 중심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마틴은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다뤄왔다. 1990년대 런던 골드스미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빗과 유사한 형태의 채색 도구를 직접 고안했다. 그는 “채색 도구란 ‘붓을 초월한 무언가(meta brush)’다. 물감이라는 익숙한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일이 중요한 창작 동기”라고 말한다. 물론 이때도 보편적인 캔버스가 아닌 금속이나 플렉시 글라스의 표면에 그리기를 선호했다.
마틴의 회화 표면 위 줄무늬는 2000~1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가늘고 촘촘해진다. 특히 검은색이나 짙은 갈색 물감을 쓴 <Oceania>(2006), <Cat O’nine Beast of Burden>(2011) 등의 작품은 곱게 빗어 넘겨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과 닮아있다. 짙은 네이비색의 작품 <Egypto>(2011)는 거대하고 칠흑 같은 밤바다의 분위기를, 붉은색을 주조로 하는 <Hero>(2005)와 <Pulse>(2007)는 뜨거운 태양의 에너지와 심장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혈액을 연상시킨다. 정리하자면, 마틴의 추상회화는 순수한 평면을 추구하기보다 특정 사물의 물성을 떠올리고, 어떤 장소 혹은 자연물의 심상 등을 담아내는 하나의 “무대이자 장”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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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CaribbeanBlue/Viridian)>알루미늄에유채120×120×10cm2021

마틴은 아크릴 물감도 자주 활용한다. 전통적인 캔버스 외에도 다양한 물질의 평면을 두루 사용하는 그에겐, 어떤 질감의 평면에도 어렵지 않게 발리는 아크릴 물감이 제격이었다. 또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등 빛을 반사하는 평면과 만나 더 드라마틱한 빛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다. 특히 <Masai>(2000)는 채도가 낮은 파란색과 흰색을 농도를 달리해 섞은 물감을 일정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나선형으로 펴 발라, 마치 화면이 스스로 빛을 내뿜으며 운동하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마틴은 화면에 물감을 두껍게 올리는 임파스토 기법의 회화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밭이랑을 갈 듯 다양한 굵기와 너비로 그어진 선과 선 사이에 지는 그늘은 2차원 회화에 3차원성을 더한다. 실리콘과 합성 점토를 섞어 마치 모래와 같은 거친 질감 또한 작품을 ‘조각적’으로 감상케 하는 포인트. 작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실제 금속을 캐스팅하는 조각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마치 그의 임파스토회화를 그대로 캐스팅한 듯, 네모난 화면에 크고 두껍게 발린 물감의 형상이 금과 은빛으로 화려하게 빛난다. 그러나 회화와는 정반대로, 제련된 금속 특유의 강한 광택으로 미니멀리즘 조각의 ‘연극성’을 부각한다. “이러한 작품의 표면은 제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반응한다. 따라서 당신이 내 작품 주변을 걷는다면, 작품 표면이 반사하고 굴절하는 빛을 경험할 것이다.”
이번 전시로 돌아와서, 폭과 높이가 최대 178cm에 달하는 회화 출품작 모두 10cm 내외 두께의 알루미늄판에 그려졌다. 정면에서 볼 땐 크게 느껴지지 않던 물감의 두께가, 측면에서 바라보면 판의 두께와 더불어 돌출되면서 작품의 3차원성이 더 크게 부각된다. 기존 작품과 마찬가지로 촘촘한 빗살무늬로 펴 바른, 광택감 있는 알루미늄판은 전시장 조명을 유려하게 되받아친다.
위의 특징들이 마틴 회화가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3차원성을 획득하기 위한 조형적 장치라면, 회화 표면 내부로 파고들며 획득되는 3차원성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듯, 마틴 회화의 평면은 순수한 물질로서의 평면이 아니라, ‘무대이자 장’으로서의 평면이다. 즉 그의 평면은 공간이다. 작가는 “회화의 공간을 들여다본다는 사실 자체가 구상회화로부터 기초한다”라고 생각한다. 구상회화, 풀어 말해 실제하는 사물이나 풍경 따위를 재현하는 회화는 화면에 하나의 ‘소실점’을 둬 입체적인 공간감을 획득한다. 20세기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이 고전적 양식을 거부한 이래로, 서서히 재현의 요소가 소거되는 과정을 거쳐 사각형 캔버스와 검은 물감만을 남긴 절대주의 회화까지 출현했다. 하지만 마틴의 추상회화는 소실점을 잊지 않았다. 화면에 구체적 형상도, 어떤 의미를 유추하게끔 하는 재현의 흔적도 없지만 여러 방향으로 그어진 물감의 선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든다. 이 점은 그저 ‘평평한 면 위에 그어진 선’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작품에 공간감은 물론, 마치 강한 바람을 동반한 태풍에 요동치는 대기의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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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마틴개인전<수렴(Conveergence)>2022타데우스로팍서울

또 이번 신작엔 연한 하늘색과 민트색, 보라색과 핑크색 등 다채로운 색채가 총동원됐다. 모든 작품의 제목마다 ‘Caribbean Blue’, ‘Ultramarine Violet’, ‘Brilliant Pink’ 등 색상명이 쓰여있다. 작가는 자신이 “즐겨 쓰는 ‘올드 홀랜드’사의 유화 물감의 제품명을 그대로 가져왔다”면서도, “천국의 하늘이나 열대 지방의 해안가 등 낙천적인 도피처를 상상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이 부드러운 색채와 화면의 소실점이 만나 의외의 효과 하나를 발휘하는데, 소중한 물건을 싸고 곱게 매듭짓는 동양의 전통 보자기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제로 작가는 일본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체류하던 중 기모노를 포장한 보자기를 우연찮게 수중에 넣었는데, 한번 풀어 헤치면 다시 정갈하게 묶을 자신이 없어 그대로 보관 중이라고.
마틴은 “언제나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를 고민해 왔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정통 회화의 규범을 벗어나 새롭게 도입한 재료와 소실점 등은 그가 스스로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여기는 가장 큰 이유다. 최근 그는 비교적 작은 크기로 제작해 왔던 캐스팅작품을 야외에서 보여주기 위한 스케일과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2차원과 3차원의 경계에 서있는 회화이자 조각이자 공공 조형물인 마틴의 작품을, 우리는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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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마틴/1970년영국저지출생.런던골드스미스대학졸업.진델핑겐샤우베어크미술관(2017),베니스페기구겐하임컬렉션(2009),타데우스로팍파리(2006,2002)다수의미술기관에서개인전개최.<피스마이너스원:무대를넘어서>(서울시립미술관2015),<Monochrome>(레이나소피아미술관2004),<Sensation:YoungBritishArtistsfromtheSaatchiCollection>(런던로얄아카데미1997)단체전참여.잘츠부르크현대미술관,CAC말라가미술관,허쉬혼미술관등에서작품소장.현재영국과포르투갈에서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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