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백일몽이 필요해!
페로탕 서울, 켈리 비맨 아시아 첫 개인전 <Wish>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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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ith a studded collar)> 종이에 수채 30.5×40.6cm 2022
어린 시절 내 라이벌은 빨강 머리 앤이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앤은 마릴라와 매슈의 초록 지붕 집에 얹혀살면서 오직 상상력 하나만으로 서러운 현실을 버텨냈다. 그 와중에 나는 소설 속의 또래 여자아이를 이겨 먹기 위해 틈날 때마다 공상하는 맹훈련을 했다. 축축한 하늘을 보며 풀 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잔디를 밟으며 멜론 맛이 난다고 허풍을 떨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앤은 병적인 망상으로 결핍을 채우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가엾은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켈리 비맨(Kelly Beeman)의 그림에는 양 갈래 머리를 푸르고 다 큰 앤이 할 법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둘도 없는 절친 다이애나와 한껏 꾸미고 사교 파티에 간다거나, 빗길을 뚫고 따끈한 럼주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는 듯한 유쾌한 장면이 나온다. 혹은 이 모든 게 더더욱 낡아버린 초록 지붕 집에서 쓸쓸한 노년을 맞이한 앤의 망상일 수도 있겠다. 켈리 비맨의 아시아 첫 개인전 <Wish>(2. 24~4. 7 페로탕 서울)에는 너무 행복해서 금세 깨져버릴 것 같은 ‘완벽한 상상의 세계’가 담겨있다. 2020~22년 팬데믹 기간에 제작한 유화, 수채화 20여 점이 출품됐다.
켈리 비맨은 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대학교에선 사회학을 전공했다. 정통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파’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데뷔 일화는 ‘될 놈은 된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우선, 미술인 DNA는 아트러버였던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보쉬, 프란시스코 고야, 파블로 피카소 등의 화집이 곳곳에 널려있는 집에서 성장했으며, 엄마의 취미 생활인 수채화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특히 비맨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를 수채화, 구아슈, 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여러 번 반복해 다시 그리길 즐겼다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작가는 건반이 아니라 종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손맛’을 잊지 못해 미술과 직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14년 뉴욕에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며, 처음 전문적으로 유화를 익히게 됐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 막스 베커만, 오토 딕스, 케테 콜비츠, 크리스찬 샤드 등을 깊이 흠모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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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cue> 종이에 수채 40.6×30.4cm 2022
비맨이 작가로서의 급물살을 탄 건 2015년.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엔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그는 JW 앤더슨의 옷을 스케치에 활용해 인스타그램에 태그를 곁들여 올렸다. 다음 날,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겸하고 있던 JW 앤더슨이 그 포스팅을 발견하고 다음 주에 있는 파리 쇼에 초대했다. 곧이어 비맨은 레스토랑 일을 바로 그만두었다. 전업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 명찰을 바꿔 끼며 여러 패션 브랜드, 출판사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단 몇 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살면서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의 엘리베이터를 얼떨결에 잡아탔지만, 어느 순간 비맨은 그것이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도 모른 채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다고. 그래서 그는 고객의 요청을 전제로 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 내면의 예술적 충동에 마음껏 집중하고자 미술가로 홀로서기를 결심했다.
켈리 비맨의 작품엔 매혹적인 푸른 눈에 풍성한 검은 생머리의 여성이 ‘복제 인간’처럼 등장한다. 처음에 작가는 자신의 여성 가족 구성원을 그렸다. “나는 ‘가모장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늘 세 명의 자매와 복작이며 지냈고, 엄마는 무척 강한 성향을 지닌 분이셨다. 초창기 작업에서 여성 인물들은 자매애가 끈끈한 나의 가족 관계에서 발로했다.” 과거에 켈리 비맨은 2~4명의 여성이 집안이나 마당에서 나른하게 여가를 즐기는 <Sisters> 시리즈를 제작해 왔다. 허나 최근엔 이들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개체로 훨훨 독립시켜 주었다고. 그는 더 이상 여성 인물을 자매들로 한정 짓지 않고 그림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전개해 나가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림과 현실의 끈을 점점 느슨하게 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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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ting at The Piano in Balenciaga Dress> 종이에 수채 71.1×48.2cm 2016
한편 ‘패션 일러스트’를 뜀틀 삼아 미술계로 도약한 만큼 작가에게 패션은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2021년 작가는 샤넬, 디올, 버버리 등을 착용한 여성 인물화 그림을 모아 『윈도우 쇼핑』이라는 아트북을 내기도 했다. 인물화에서 패션은 계절과 시대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성격, 직업, 기분을 넌지시 알리는 힌트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여름에 유행한 트렌드에서 영감을 받아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스트라이프 패턴과 파스텔 색감을 주로 사용했다. 캐러멜이나 사탕 포장지에서 자주 볼 수 있던 문양이다. 또한 작가는 드로잉과 유화 매체를 오가며 심상을 표현하기에 더욱 적합한 패션을 찾아낸다. 그는 우선 점묘법을 활용한 흑백, 세피아 톤의 드로잉을 만든 후 이를 다시 유화로 크게 확대해 그린다. 가령 이번 전시에 출품된 드로잉 <The Flood>(2022)와 유화 <Warm Wishes>(2022)는 구도와 구성은 똑같지만 디테일이 다르다. 여성의 품에 들려있는 고양이가 실뭉치로, 플라워 패턴 드레스가 단정한 블랙 컬러로 뒤바뀌어 있다. 드로잉이 유화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대개 배경은 더욱 단순해지며, 제목도 특정한 상황을 지시하는 것에서 추상적인 감정으로 변한다. 작가가 두 단계를 거치는 동안 여성 인물은 점차 실제 세계에서 멀어져 간다.
켈리 비맨의 그림에서 ‘분노와 악의’는 찾을 수 없다. 달콤한 디저트를 베어 물고, 알록달록한 풍선을 두둥실 날리는 황금의 기호밖에 없다. 빳빳한 새 S/S 컬렉션을 갖춰 입고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듯한 ‘금수저’ 인플루언서의 피드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켈리 비맨의 그림에 들어있는 이 충만한 행복은, 곧 기화돼 뭉게뭉게 사라져 버릴 것 같이 아득할까? “안정과 불안. 내 그림엔 상반된 두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그림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과 분리돼 있지만, 이 평온한 모습은 언제라도 깨질 듯이 ‘연약’하다.” 작가는 몽환적인 유화를 제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호한 배경과 흐릿한 색채를 사용한다고. 켈리 비맨의 작업 세계엔 ‘도피주의’가 흐른다. “내 작품은 ‘신기루’ 같다. <Wish>라는 전시 제목에도 희망과 슬픔이 함께 깃들어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로 돌아가려는 염원, 현실로부터 더 나은 곳으로 도망치려는 소망이 모두 함축된 단어다.”
삶에서 예고 없는 고난을 맞닥뜨릴 때 혹은 지루한 일상에 권태를 느낄 때, 어떤 이는 상상과 망상과 몽상을 쥐어짜 현실에서 달아난다. 메아리에 ‘비올레타’라는 이름을 붙여 친구 삼았던 외로운 앤처럼. 그러나 상상력은 단지 눈앞의 진실을 외면하려는 쾌락이 아니라, 시적인 가정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고유한 삶의 영역과 가치를 확립시키는 독특한 힘이다. 실로 괴테는 『시와 진실』(1811)에서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팩트라는 굳은 땅 위에 탄력적인 상상력을 가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켈리 비맨의 그림은 각박하고 피곤한 동시대인들이 탈출할 수 있는 안락한 꿈이자, 모두에게 필요한 ‘대낮의 백일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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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비맨 / 1983년 미국 오클라호마 출생. 뉴욕 헌터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다. 루이비통(2020), JW앤더슨(2015) 등 유수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High Voltage Two>(텔아비브 나시마랜도 2021), <2020>(뉴욕 티에리골든버그갤러리 2020), <A Scratch in Time>(티에리골드버그갤러리 2018) 등 단체전 참여.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