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댄 캐머런을 아는가?
BB&M갤러리, 미국 구상화가 5인전 <드림 라이프>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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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슨 리더 <Mango> 캔버스에 아크릴릭, 연필 81.3×111.8cm 2022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성북동,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BB&M갤러리를 찾았다. 손부채질로 열기를 식히며 들어선 전시장. 커다란 통유리 사이로 내리쬐는 자연광이 갤러리를 예술작품의 온실로 만들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기자단 사이로 단정한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중년 남성이 한가운데 우뚝. ‘아, 저 사람이 캐머런이구나’ 직감했다. 엔데믹이 오긴 온 걸까, 드디어 국내 아트씬에 해외 미술인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도피주의와 미국적 태도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간담회 자리를 알리는 목소리 덕에, 오랜만에 지근거리에서 본 외국인에게 뺏겼던 눈길을 전시로 돌릴 수 있었다. <드림 라이프>(5. 21~7. 2)는 세계적인 큐레이터 댄 캐머런 (Dan Cameron)이 주도한 미국 작가 5인의 단체전이다. 그 주인공은 에스테반 카베자 드 바카, 알렉스 도지, 라피 카렌데리안, 타이슨 리더, 미코 벨드캄프. 전시는 ‘미국 구상화의 한 흐름’이라는 키워드로 구성됐다. 2010년대에 세계적으로 열풍이 분 ‘좀비 형식주의’에 근거한 추상화가 아니라, 구상화에서 예술의 활로를 찾고 있는 양상에 포커스를 맞췄다. 캐머런은 이들이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에서 구상화의 명맥을 잇고 있다는 말로 입을 떼며, 통역자가 끼어들 타이밍을 재기 어려울 정도로 작가와 작품을 공들여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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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반 카베자 드 바카 <Secret Desert> 패널에 아크릴릭 36.2×30.5cm 2020
이쯤에서, ‘잠깐 저 큐레이터가 대체 누구길래’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독자도 있을 테다. 댄 캐머런은 도발적인 전시로 수차례 논쟁의 불씨를 지핀 뉴욕의 큐레이터다. “한국에서 전시를 열기까지 당신이 걸어온 길을 들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실로 그 이력은 화려하다. 1982년 캐머런은 뉴뮤지엄에서 퀴어 아트를 정면으로 다룬 <Extended Sensibilities>를 열며 아트씬에 돌풍을 일으켰다. 휘트니미술관에서 ‘볼품없는’ 리처드 터틀을 전시했다는 이유로 담당 큐레이터 마샤 터커가 해고당한 1970~80년대 미국의 보수적인 미술계를 떠올린다면, 당시 그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후 그는 한동안 미국에서 활동할 수 없어 유럽으로 건너갔고, 스페인에서 세 차례 기획전을 주도하며 미국과 유럽 외의 글로벌 컨템퍼러리아트까지 핸들링하게 됐다. 한편 터커의 제안으로 1995년부터 뉴뮤지엄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다시 한번 재밌는 폭탄을 던진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주류 미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캐롤리 슈니먼의 뉴뮤지엄 개인전을 성사한 것. 이후 캐머런은 이스탄불비엔날레(2003), 타이베이비엔날레(2006)의 총감독을 역임했고, 2008년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초토화된 도시를 재건하고자 ‘프로스펙트 뉴올리언즈’라는 예술행사를 열었다. 규범에 순응하지 않고,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물으며, 창조적 가능성의 물꼬를 트는 것이 캐머런 큐레토리얼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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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 벨드캄프 <Passenger Ghost>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76.2×101.6cm 2022
2022년 5월의 서울로 돌아와 <드림 라이프>를 살펴보자. 이번 전시는 지역적 정체성을 작품에 반영하거나, 특정한 재료로 고유한 표현법을 모색하는 경향이 눈에 띈다. 카베자 드 바카는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 배경을 양분 삼아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상형 문자를 풍경화에 접목한다.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활동하는 알렉스 도지는 우키요에 기법으로 디지털 시대의 감수성을 드러낸다. 네덜란드 출신 미코 벨드캄프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미술사 도상을 활용하고, 라피 카렌데리안은 화려한 패턴을 인물화에 적용해 상징주의 회화사를 갱신한다. 타이슨 리더는 연필과 수채로 미국의 서브컬처 라이프를 속도감 있게 사생한다. 캐머런은 작가를 모아놓고 보니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마지막 퍼즐’이 필요했다고. 꿈과 삶을 포갠 <드림 라이프>란 전시명은 그렇게 귀납적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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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 카렌데리안 <Dave> 캔버스에 유채 122.6×91.4cm 2021
또한 그는 이들에게서 ‘도피주의’와 ‘미국적 태도’를 포착한다. 도피주의는 현실을 직면하기보다 공상의 세계로 달아나려는 자세다. 가령, 작가들은 사실적으로 대상을 그리지만, 추상적인 요소도 가미한다. 눈앞의 현실을 명징하게만 담지 않는다. 하지만 도피주의를 무책임과 방만으로만 볼 수 있을까? 혁명과 혁신은 불만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열망을 더하면 변화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러니 도피주의는 이상주의의 다른 말로서 세상을 추동하는 원동력일 수 있겠다. 다음으로, 과연 미국적 태도란 무엇일까. 이는 도지의 작품 <Catastrophic System Failure>에서 두드러진다. ‘재앙적인 시스템 실패’. 방역 구멍이나 테러 공습같이 심각한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쓰이는 말을, 도지는 오동통 귀여운 폰트에 사탕처럼 달콤한 색을 발라뒀다. 캐머런은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블랙 유머로 그 순간을 ‘웃프게’ 모면하는 태도가 미국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이 감정에 깊이 몰입하는 ‘신파’의 정서를 공유하듯, 미국은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해 희망을 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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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도지 <Nigel, After the Humans> 패널에 유채, 아크릴릭, 폴리에스테르 121.9×91.4cm 2022
<드림 라이프>는 캐머런식 큐레이팅의 ‘라이트’ 버전이다. 굵직한 이벤트를 기획해 온 만큼, 전시의 틀을 잡고 작품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데 노련하다. 전시장 코너를 돌 때마다 유기적으로 뭉쳐지고 흩어지는 다섯 작가의 작품이 보기 좋은 시각적 화음을 낸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며 약 10년 만에 방문한 한국 미술계에서 무엇이 가장 달라졌는지 물었다. (참고로 캐머런은 2010년 제8회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의 초빙 교수로 광주와 서울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어제와 오늘,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을 둘러봤다. 그 주변 갤러리도 방문하고. 한국 아트씬에서 가장 바뀐 점이라면 단연코 두 배 넘게 팽창한 미술시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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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캐머런 / 1956년 뉴욕 출생. 뉴욕 시러큐스대학교 및 베닝턴컬리지 졸업. 미국 최초로 게이와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주제로 한 미술관 전시 <Extended Sensibilities>(뉴뮤지엄 1982)기획. 뉴뮤지엄, 오렌지카운티뮤지엄, 뉴올리언스CAC 등에서 약 40여 년간 수석큐레이터로 활동. 제5회 타이베이비엔날레(2006), 제8회 이스탄불비엔날레(2003) 등 수많은 국제 전시 개최. 2008년에는 미국 최초의 국제 비엔날레인 프로스펙트 뉴올리언즈 설립. 카타리나 그로세, 니콜 아이젠만 등 동시대 주요 예술가와 현대 미술담론을 다룬 다수의 저서 출간.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