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여행사’ 서울 오픈
아뜰리에에르메스, 로르 프루보 한국 첫 개인전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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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 (Uncle’s Travel Agency Franchise, Deep Travel Ink.)> 설치 전경
로르 프루보는 1978년 프랑스 릴에서 태어나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부터 런던에서 유학하며 작가로 데뷔했고, 지금은 런던과 앤트워프를 오가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일찍이 낯선 환경에서 자라온 경험은 그의 작업에 주요한 자양분이 됐다. 복잡한 프랑스어 문법, 영어와 플라망어를 구사하는 지역에서의 생활, 번역의 오류와 소통 불가능성, 이민자가 겪는 난처한 감정들…. 이러한 배경에서 프루보는 새로운 감각을 늘 예민하게 포착하고, 예술언어로 유쾌하게 번역해 왔다. “외국인 혹은 이방인으로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찰흙을 가지고 놀 듯, 여러 단어를 좀 더 자유롭고 재밌게 사용할 수 있어서다.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많은 것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내 삶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상상력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도록 했다. 불완전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상상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이야기, 말의 가치를 묻는 방법
프루보의 한국 첫 개인전(3. 25~6. 5)이 열렸다. <심층 여행사>라는 제목처럼, 전시장을 작은 여행사 사무실로 연출했다. 공간 설치 연작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 싱글채널 영상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 텍스트 작품 <올라가셨어야죠> 총 3점이 소개됐다.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는 2016년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개인전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2018년 리슨갤러리 뉴욕 개인전,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 메리디안스 섹터에 꾸준히 선보였다. 이번 서울 개인전 버전은 여행사의 네 번째 가맹점.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세계 곳곳에 가맹점을 세우겠노라 큰소리치던 삼촌의 사업 확장 계획을 반영했다. 아뜰리에에르메스에 ‘개업’한 사무실에 들어가려면 높이 120cm, 폭 80cm의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작가가 의도한 ‘심층’에 진입하는 포털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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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Uncle’s Travel Agency Franchise, Deep Travel Ink.)> 설치 전경. 전시장에 가상의 여행사를 연출했다. 2016년 프랑크푸르트에 ‘첫 지점’을 낸 이후 뉴욕, 마이애미에 이어 서울에 네 번째 가맹점을 열었다. 관객은 각종 사진, 지도, 서적, 장식품을 관찰하면서 ‘심층’으로 떠나는 여행을 상상하게 된다.
작가는 무한한 상상을 재료 삼아 서사를 창작하지만, 자신의 실제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실과 허구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래서 관객은 작품을 해석할 때는 물론, 작가의 설명을 들을 때조차 어느 말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쉬이 구분하기 어렵다. “할머니에게는 많은 한국인 친구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삼촌은 서울에 여행사를 차리게 되어 매우 기뻐하고 있다. 삼촌은 지금 보트를 타고 오는 중이라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은데, 나도 정말 함께하고 싶다.”라며 한국 첫 개인전 소감을 전한 작가의 말은 태평양 어디쯤 보트를 운전해 오는 삼촌을 상상하게 한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오로지 그 말 때문에 우리는 삼촌을 기다리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결정할 일은 많지 않았다. 대신 삼촌은 서울에 여행사를 열고자 무척 열심이셨다. 삼촌과의 열띤 논의로 모든 걸 결정했고, 그 결과 이 전시를 선보일 수 있었다. 더 깊은 곳 어딘가, ‘심층’으로 모두 함께 가볼 수 있는 것, 어떻게 신앙적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궁리해 보는 것, 그리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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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 (Uncle’s Travel Agency Franchise, Deep Travel Ink.)> 설치 전경.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에 입장하면 더욱 알쏭달쏭한 장면이 펼쳐진다. 일반 여행사 사무실처럼 비치된 가구와 전자 기기 한편에는 멀티탭 대신 감자에 꽂힌 콘센트, 백미러가 달린 나무 지팡이, 갈색 물이 담긴 정수기, 이국적인 도자 장식품 등이 평범한 현실에 균열을 낸다. 프루보는 여기에 가상의 할아버지가 겪은 여행담을 섞어낸다. 프랑스 작가로는 최초로 영국 터너미술상을 수상한 작품 <원티>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다.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개념미술가인 할아버지는 영국 북부의 작업실부터 아프리카까지 땅굴을 파다가 끝내 실종된다. 위대한 대지미술을 선보이겠다는 일념만 남긴 채 사라진 남편을 대신해, 아내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각종 세라믹 조각과 찻잔을 만들어 모금 활동을 펼친다. 여행사에 전시된 동물 조각과 촛대, 차 도구들은 모두 할머니의 아르브뤼(Art Brut) 작품이다. 작가는 언젠가 실제로 벌어졌을 법한 내러티브를 직조하면서 이야기 짓기의 매력을 즐기는 동시에 남성 모더니스트의 무모한 영웅주의, 조력자로 머물러 있던 여성 예술가의 존재, 가부장주의 미술사를 소환한다. 프루보의 예술은 여러 작품이 연결되고 주제를 밀접하게 공유하면서 거대한 세계를 구축해 간다. “작품이 어떤 맥락에 따라 발전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마치 와인처럼 숙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가가 모든 걸 통제하지 않을 때 마주하는 다양한 경험,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의 관점이 더해지면 작품이 한층 복잡하면서도 흥미롭게 변한다. 내게 ‘이야기의 힘’은 주변 사람과의 교류에 있다.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말과 사실의 가치를 질문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유머와 즐거움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다층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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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셨어야죠(YOU SHOULD HAVE GONE UP)> 보드에 아크릴릭, 바니시 57.1×37.2×2cm 2019_2019년 런던 지하철 프로젝트에 전시한 포스터 문구의 일부를 따왔다. 똑같은 문장도 다른 맥락에서는 새롭게 해석된다.
한편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에는 빠른 속도로 교차하는 짧은 영상, 강렬한 사운드, ‘당신’을 화자로 세뇌하는 듯한 문구와 명령형 텍스트가 관객을 현혹한다. 영상 후반부에는 가진 게 없어도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이 진정한 부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현대 사회의 배금주의를 추적하고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워지는 판타지를 꿈꾼다. 새까만 보드에 흰 글자만 덩그러니 찍힌 작품 <올라가셨어야죠>는 아무런 맥락 없이 관객이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올라가다’라는 단어의 수많은 물리적, 상징적, 은유적 의미가 저마다의 상상과 만나 서로 다른 기억을 부른다.
현실을 발판 삼아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고 도약하는 로르 프루보. 그가 현재 그려나가고 있는 큰 꿈은 무엇일까? “할아버지가 영국에서 북아프리카로 가는 터널을 완성하도록 돕고 싶다.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으러 떠날 수도 있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위해 만든 모금 활동 사이트(laureprouvost.com/menu2.html)에 기부해도 좋다. 할아버지가 정말로 그립지만, 그가 꿈을 실현해 가는 중이라는 건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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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 프루보(Laure Prouvost) / 1978년 프랑스 릴 출생. 런던 센트럴세인트마틴스 학사 및 골드스미스대학 석사 졸업. 마스트리히트 보네판테미술관(2021), 맨체스터 유대인박물관&리손갤러리 뉴욕(2021), 코펜하겐 쿤스탈샬로텐보그(2021), 리스본 쿤스트할레리사본(2020), 앤트워프현대미술관(2019) 등에서 개인전 개최. 베니스비엔날레(2019) 프랑스관 대표 작가. 터너미술상(2013), 런던 화이트채플갤러리 막스마라 여성 미술상(2011) 수상. 현재 런던과 앤트워프를 중심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