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초상, 소통의 창
에가미 에츠, 올여름 탕컨템퍼러리아트 서울 개인전 / 조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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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 캔버스에 유채 196×126cm 2021
일본의 전후 3세대를 대표하는 화가 에가미 에츠. 그는 소통으로 빚어낸 상생과 공존의 세계를 화폭에 담는다. 에가미 회화의 핵심 주제인 ‘소통’은 오랫동안 타지 생활한 경험에서 기인했다. 작가는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고, 베이징 중앙미술학원미술관과 독일 카를수르에미술디자인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본격적인 아티스트의 길에 접어들었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보낸 시간 동안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커뮤니케이션 문제였다. 사소하게는 언어부터 크게는 문화 차이까지, 에가미는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과 타인을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부채감을 동시에 껴안아야만 했다.
그러나 오해와 불화의 경험은 예술이 지닌 소통의 가능성을 진중하게 마주하는 계기가 됐다. 사용하는 문자가 달라도 그림이 지닌 시각 언어는 보편성을 지닌다. 구구절절 긴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아도 형상과 색이 전달하는 정서는 타인의 내면에 깊숙이 닿는다. “진정한 언어는 느낄 수 있을 뿐 설명되지 않는다.” 에가미는 말로는 담기지 않는 진심이 그림으로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이 같은 깨달음으로 타인의 이해를 향한 초상화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게 사람의 얼굴은 소중하다. 오해와 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낯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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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오해의 순간에, 모든 얼굴은 몰락한다> 전경 2021 탕컨템포러리 베이징
무지개 너머 아르카디아
에가미에게 이해란 ‘나’와 타인의 생각, 마음이 같아지는 일이 아니다. 반대로 작가가 생각하는 이해는 ‘나’와 타인의 다름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서로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다면 소통은 그 필요를 잃는다. 공유된 사정 앞에서 존재는 더 이상 상대를 위해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다른 것과 틀린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한다. “인간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거리를 평가하려 서로 소통한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은사람과 사람의 거리, 그 틈을 응시할 때 비로소 발생한다.
평행선으로 구성한 초상화에는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사유가 근저에 깔려있다. 기하학은 평행선의 개념을, 두 개의 직선이 나란히 있어 아무리 연장해도 서로 만나지 않는 관계로 규정한다. 작품에서 교차하지 않는 복수의 선은 사람과 사람 간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은유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간격을 말미암아 우리가 이해와 소통에 도달하듯, 획의 집합은 인물의 형태를 완성한다. 다채로운 색선으로 점철된 그의 그림은 얼핏 보면 무지개와 닮았다. 작가는 무지개의 일곱 빛깔 스펙트럼이 인류의 다양성을 상징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무지개 너머 인간이 타인을 소외하지 않고 상생하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아르카디아를 향한 소망을 담았다.
한편 에가미의 작업에서 생김새나 체격, 패션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은 묘사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그의 작업엔 ‘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 대상의 내면인 까닭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에는 관객이 각자 주변 인물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의도 역시 숨어있다. 인물의 구체적인 특징이 배제된 초상화를 보고 관객은 각자가 상기한 인물의 내면을 상상하면서 타인과 진정한 소통에 다가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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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 캔버스에 유채 170×250cm 2022_유화에 수묵화 기법을 결합해 다양한 그러데이션과 농도를 지닌 그림을 완성했다.
에가미는 작년에 개최한 개인전 <별의 시간>(2021. 7. 31~8.11 긴자아트리움)에서 문인(文人)을 주제로 신작을 발표했다. 지인을 모델로 한 초상 대신 에밀 졸라, 장 폴 사르트르,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등 평소 동경했던 문학가를 그림으로 펼쳤다. 각 그림의 제목은 대상을 대표하는 문장이나 작품명에서 빌려왔다. 초상으로 그린 인물은 물론, 그가 집필한 문학 세계에 접근했다. 오사무의 『인간실격』 영문명을 차용한 <No Longer Human>은 멍과 같은 검푸른빛을 테마로 삼았다. 전체주의를 겪은 개인의 소외와 상처를 서사화했던 오사무의 주제 의식을 화면에 나타냈다. 반면 사르트르를 그린 <There May Be Better Times, But This Is Our Time>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곡선으로 생동하는 분위기를 표현했다.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주체적 삶을 찬미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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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별의 시간> 전경 2021 긴자아트리움
에가미는 지난 5월 아트부산 컨버세이션스의 연사로 나섰다. 또 올해 여름 탕컨템포러리아트 서울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키아프 서울과 아트부산에서 도쿄 화이트스톤갤러리 대표 출품작으로 소개된 것을 제외하면 한국 관객과 처음으로 만나는 기회다. 기존 작품과 달리 대형 신작에 도전할 예정이다. “대형 캔버스 앞에서 화가의 몸은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단순히 손을 움직이기보다, 온몸을 움직일 때 타인을 이해하는 데 좀 더 전력으로 다가설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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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미 에츠 / 1994년 일본 지바 출생. 베이징 중앙미술학원미술관에서 유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류샤오동을 사사해 석박사를 졸업했다. 뉴욕 챔버스파인아트(2021), 화이트스톤갤러리(대만 2021, 도쿄 2019), 가루이자와뉴아트갤러리(2021), A2Z파리(2021), 지바시립미술관(2020), 지바아트센터(2018), 베이징 드사르뜨갤러리(2016) 등에서 개인전 개최. <Low Fever>(탕컨템포러리아트 홍콩 2021), <VOCA>(우에노모리미술관 2020), <UNSCHEDULED>(홍콩 타이퀀현대미술관 2020) 등 단체전 참여. 『포브스』 30세 이하 리더 30인에 선정. 현재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