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백남준 5주기 : ① "백남준 선생님, 고맙습니다!"
2011 / 01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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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안경을 쓰고 포즈를 취한 백남준, 1989년
art와는 故 백남준 5주기를 맞이하여
그간 art in culture에서 다루었던 故 백남준에 관한 기사들을 되돌아봅니다.
<< art in culture 2006 03(http://www.artinculture.kr/content/view/122/38/) >>
"백남준 선생님 고맙습니다!"
art는 위대한 예술가 故 백남준 선생을 추모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뉴욕의 장례식과 국내의 분향소를 취재한 화보, 둘째, 미학자이자 시사평론가인 진중권이 쓴 추모기사 ‘하이 테크네의 광대’, 셋째, 주요 도록들에 게재된 자료들을 꼼꼼히 취합·비교·선별해 만든 사진연보―‘108장의 사진자료로 보는 백남준 선생의 일생; 1932년부터 2006년까지’, 그리고 넷째, 호나야 화백이 그린 ‘2·3 경기고 백남준 추모식’. 1932년 7월 20일에 태어나 올해 우리나이로 75수를 맞은 선생은, 지난 1월 29일 오후 8시(현지시간)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고인이 뇌출혈로 쓰러졌던 것은 10년 전인 1996년 4월,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작곡가로 시작해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고 독자적으로 비디오아트를 전개한 그는 1990년대 초·중반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을 급격하게 변화시킨 장본이기도 했다…. art는 선생께 아직 작별인사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대신 감사하다고,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올리고 싶다. 아마 그런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백남준 선생의 법적 대리인 노릇을 맡고 있는 조카 켄 백 하쿠타의 추모사였을 것이다. 인사를 대신해 그의 연설 전문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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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켄 백 하쿠다가 추도사를 연설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부인 구보타 시게코와 가운데에는 요코 오노가 보인다. 사진 윤정미
애도하는 마음은 잠시 접고, 지금부터 여러분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저희 삼촌 백남준과 함께 했던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사건입니다. 1998년 6월,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만찬에 삼촌이 초대됐었습니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죠. 당시는 그해 1월 혹은 2월에 터졌던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 양의 스캔들이 한참 고조됐던 때입니다.
삼촌은 백악관으로 가면서 제게 동행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같이 가겠다고 했죠. 전 삼촌과 함께 차를 몰고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덩치 큰 해병대 병사들이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제가 기억에 삼촌은 매우 즐거워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리셉션 라인으로 갔습니다. 갑자기 삼촌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보조보행장치로 리셉션 라인을 가로지르려 했습니다. 아마도 삼촌은 영부인 힐러리와 그곳의 다른 귀빈들에게 경의를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빈 만찬에서 리셉션 라인을 넘어가는 것은 ‘월드뉴스토픽’감입니다. 온갖 기자들이 그곳에 있었고요.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 십대의 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가 있었습니다.
어찌됐건 삼촌은 클린턴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고, 저는 그 뒤에 서있었습니다. 그때, 삼촌이 뒤를 돌아보더니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켄! 내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 같아. 정말이야” 저는 “뭐라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삼촌은 한 번 더 “내 바지가 흘러내리고 있다구!”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정말로 삼촌의 바지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바지는 완전히 바닥까지 흘러내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삼촌의 바지를 끌어올렸고 더 이상 삼촌의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꽉 붙잡았습니다.
한편, 꽤 쿨한 대통령인 클린턴은 삼촌과 계속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따님인 첼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둘의 대화가 끝나고 몇 발자국 움직인 후 보니, 옆에 있던 힐러리는 전혀 재밌지 않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얼굴을 붉히고 있었죠. 그런데도 클린턴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죠.
이렇게 재미있는 만찬사건 후, 삼촌은 수백 통의 전화와 팩스를 받았습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삼촌의 친구들은 그 사건이 세계에서 가장 플럭서스한, 즉 전위적인 퍼포먼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언론인들은 그 사건이 우연한 사고였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듯, 삼촌은 비록 휠체어에 앉아있을지라도 문화적 테러리스트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촌에게 일부러 바지를 흘러내리게 꾸몄느냐고 물었습니다. “행위입니까? 예술적인 선언입니까? 아니면 정치적 의도인가요?”라고 말이죠. 삼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바지가 흘러내렸고 그게 전부란다.” 그리고 삼촌은 “이런 게 바로 백남준이야”라고 말했어요. 삼촌이 뭐라고 대답했건, 그 일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삼촌은 절대 기가 꺾이는 법이 없는 사람입니다. 삼촌이 당황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저는 클린턴 대통령 역시 그 사건에 상당히 침착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합니다. 과민 반응한 언론은, ‘대통령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바지가 백악관에서 흘러내렸다’고만 보도했습니다. 그 사건은 진정한 플럭서스 이벤트였습니다.
2004년 8월 맥도웰 메달을 대리 수상할 때, 저는 한두 시간 전쯤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서 예술가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랬습니다. 삼촌은 “열심히 작업하시되, 게으르게”라고 말했습니다. 백남준다운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촌은 여러분 모두에게 안부를 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켄 백 하쿠타
하이 테크네의 광대
글|진 중 권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던 백남준. 그가 떠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추억하고 싶지만, “낳기만 한”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발자취를 잘 살필 수 없다. 국내에 뜨문뜨문 보여진 그의 모습이라고는, 1984년에 물끄러미 바라만 봤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나 부정확한 발음으로 “창조! 창조! 창조!”를 외쳤던 TV광고 정도. 필자는 이러한 ‘수박 겉핥기’식의 이해로 인해 “저평가”된 백남준의 업적과 그 이론적 배경을 소개한다. 음악에서 출발, 플럭서스에 가담한 후 텔레비전이 가진 매체성에 천착하기까지. 당대 이론가들의 이슈와도 부합했던, ‘하이 테크네의 광대’의 낙관적인 예견은 벌써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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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존 케이지의 조우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독일에서 ‘플럭서스’ 퍼포먼스를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디어 설치작업을 했다. 1970년대에 미국시민권을 획득했고, 조국은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는 어디까지나 미국인인 셈이다. 게다가 그는 군대도 안 갔다 왔는데, 그 극성스러운 애국시민들이 군말 없이 그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언론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세계적인 예술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많다. 본의 아니게 한국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졸지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가 됐지만, 사실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드는 데 조국이 기여한 것은 정자(精子)와 난자(卵子)를 제공한 것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라는 말은 옳다. 한국은 그를 낳았다. 낳기만 했다.
음악에서 미술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백남준의 경력은 음악에서 시작됐다. 1950년에 도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음악, 미학, 예술사를 공부하며, 아놀드 쇤베르크에 관한 논문을 썼다. 1956년 독일로 건너간 그는 뮌헨대학에서 음악사 공부를 계속한다. 여기서 안톤 베베른에 관한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재미있게도 이미 당시에 ‘12음 기법의 매너리즘’을 불평하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그는 프라이부르크 음대로 가서 볼프강 포르트너로부터 작곡을 배운다. 스승은 동양에서 온 제자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후에 그는 백남준이 “매우 비상한 현상”이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노라고 술회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백남준은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과 함께 쾰른에 있는 WDR 방송 스튜디오에서 전자음악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의 경력에서 갈림길이 된 것은 1958년에 있었던 존 케이지와의 만남일 것이다.
백남준은 케이지에게서 음악이 퍼포먼스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유명한 케이지의 〈4분 33초〉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는 소음을 음악으로 끌어들이는 구체음악이 있고, 무대 위의 볼 것을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이 있고, 부조리의 진행을 지켜보는 체험의 연극적 요소가 있다. 선(禪)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케이지 덕분이었다. 가령 TV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TV 부처〉(1974)는 마치 피아노 앞에 앉은 〈4분 33초〉의 연주자를 떠올린다.
액션 뮤직
독일의 현대음악과 케이지의 미국적 실험음악은 성격이 다르다. 시리얼 음악이 음렬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철저한 합리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면, 케이지의 것은 비결정성을 극대화하는 비합리주의를 지향한다. 필연적 질서를 지향하는 몬드리안의 합리적 구성과, 발생의 우연에 내맡기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 사이의 차이라고 할까? 어쨌든 백남준은 사건성, 우연성, 비결정성을 케이지보다 더 과격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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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섹스트로닉>의 홍보 전단지
“왜 음악에만 섹스가 금지되어야 하는가?” 최초로 음악에 ‘에로틱’을 도입한 것 역시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이 속옷차림으로 등장하는 〈오페라 섹스트로닉〉(1968), 열 명의 젊은 남자로 하여금 차례로 발기된 페니스로 종이 커튼을 찌르게 한 〈젊은 페니스 심포니〉(1968), 7cm의 TV 모니터 두 개를 브래지어로 사용한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등은 섹스를 음악에 통합하는 예로 볼 수 있다.
이런 ‘액션 뮤직’ 때문에 후로 그에게는 늘 ‘파괴적 예술가’, ‘예술적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니게 된다. 이는 당연히 플럭서스 멤버들이 공유한 뒤샹적 제스처와 관련이 있다. 이 다다이스트적 유머가 백남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클린턴 앞에서 바지를 내려 그의 스캔들을 풍자했다는 등 그의 기행만 강조하는 것은 자칫 그가 현대미술에 기여한 더 중요한 지점들을 덮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미지의 혁명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TV에서도 고해상(high fidelity)의 그림으로부터 저해상(low fidelity)의 그림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말을 하며 모네를 거론한 것으로 보아, 백남준은 TV를 가지고 인상주의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상파 이후 현대회화는 대상이 아닌 지각 자체를 주제화했다. 마찬가지로 백남준 역시 전자매체로써 “콘텐츠 레벨의 지각”에서 “프로세스 레벨의 지각”으로의 이행을 준비한다. “고해상의 그림으로부터 저해상의 그림으로.”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라는 맥루헌의 구별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백남준의 작업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맥루헌의 이론적 영향이 느껴진다. 맥루헌은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 전자매체가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세계를 육안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영상을 통해 보는 시대에 처음으로 백남준은 새로운 영상과 지각의 문제를 주제화했다.
현대회화는 화폭에서 대상을 지워나가는 ‘형상금지’의 계율을 실천했다. 텅빈 화폭에 다시 이미지가 돌아오는 것은 1960년대. 앤디 워홀은 화폭에 계열화한 복제 이미지들을 끌어들인다. 또 다른 혁명은 백남준의 것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브라운관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한 사진이나 영화와는 다른 미학적 질을 갖기 때문이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체한 것처럼 언젠가 음극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
1963년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동시에 ‘TV 예술’의 데뷔전이기도 했다. 〈TV를 위한 선(禪)〉(1963)에서 백남준은 옆으로 세워놓은 TV수상기 위에 수직선만 하나 띄워 놓았다. 바넷 뉴먼이 캔버스로 한 작업을 백남준은 음극관으로 대신했다. 영상은 미니멀하나, 의미는 맥시멈이다. 적어도 여기서 TV는 더 이상 수상기(受像機)가 아니다. 여기서 수상기는 이미지를 만드는 기계로 기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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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뉴욕아방가르드축제(1964) 기간 중 거리를 활보하는 로봇 K-456
텔레비전에 반격을
전자매체의 가능성에 환호했던 토론토 학파의 이론가들에게도 방송매체가 가진 일방성은 우려스러운 현상이었다. 내가 아는 한 처음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꾀한 사람 역시 백남준이었다. 실험은 이미 플럭서스 시절에 시작되었다. 〈자석 TV〉(1965)라는 작품에서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고리 모양의 자석을 움직여 텔레비전 화면에 간섭무늬를 만들어 냈다. 이는 물론 획일화한 정보의 일방적 소통에 저항하려는 제스처다.
“텔레비전은 평생 동안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 그는 이미지를 단의미와 단방향으로부터 해방시켜, 텔레비전이 발휘할 수 있는 소통 가능성을 살려내려 한다. “어느 누구라도 집에서 점점 늘어나는 여가를 이용해 자신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수동적인 소일거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창조의 매체, 의사소통을 위한 양방향의 채널로 이용해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매체로 발전시킬 수 있다.”
인터넷 시대가 오기 직전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는 미래의 매체는 영상을 전달하는 TV 수상기와 전화의 쌍방향성을 결합한 형태가 될 거라 말했다. 그의 예측은 오늘날 컴퓨터 모니터와 초고속망의 모니터의 형태로 실현됐다. 하지만 플루서의 생각은 아마도 백남준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비디오 클립이 나오기 오래 전에 이미 그는 〈Do It Yourself TV〉의 실험으로 쌍방향적인 전자회화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1965년 소니사에서 휴대용 비디오를 내놓자 백남준은 즉각 그것의 예술적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해 어느 날 그는 뉴욕 5번가를 지나는 교황을 촬영해 이를 그날 밤 예술가들의 카페에서 상영했다. 최초의 비디오 아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비디오는 영상에 대한 대중의 태도를 바꾸어 놓는다. 백남준이 실험했던 그 일, 즉 비디오를 제작하고 편집하고 변조하는 일은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됐다.
물론 레스 레빈이나 프랭크 질렛과 같은 작가는 백남준보다 앞서거나 거의 동시적으로 비디오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안적 뉴스 보도와 연결된 행동주의적 다큐멘터리”였을 뿐이다. 그 밖에 브루스 나우만도 비디오를 이용했으나, 예술가의 창조적 제스처를 탐구하는 수단적 활용이어서, 매체 자체에 주목하여 그것을 주제화한 백남준과는 사뭇 다르다. 따라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는 역시 백남준이라 할 수 있다.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는 말로 백남준은 회화의 죽음을 선언했다. “이 TV 수상기를 20세기의 조각으로 명명한다”는 보스텔의 말은 백남준의 것이기도 했다. 비디오 아트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의 회화와 조각이 픽셀의 움직임으로 바뀌는 그림의 혁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백남준은 친구에게 “앞으로 비디오 설치 작업이 예술세계를 장악 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의 예언은 오늘날 글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회화와 조각이 죽자 미술관의 성격도 바뀌었다. 보리스 그로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미술관에는 어떤 불편함이 있다. 과거에 미술관의 그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관객이 움직였다. 반면 영화관에서는 그 반대로 그림이 움직이고 관객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니터가 화폭을 대신하게 되자, 상황이 달라진다. 움직이는 그림 앞에서 관객은 당혹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마저 어느새 몸에 익은 미술관의 일상이 되고 있다.
기술과 예술
초기 플럭서스의 다다이스트 이미지가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백남준의 면모를 가리듯이,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규정 역시 백남준의 세계가 가진 더 중요한 차원을 뭉개버리는 경향이 있다. 백남준이 주제화한 것은 비디오가 아니라, 일찍이 벤야민이 제기했던 것, 즉 예술과 기술의 관계의 문제에 대한 물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술복제〉 논문에서 벤야민은 기술이 예술을 복제하는 수준을 넘어, 거꾸로 예술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지적한 바 있다.
백남준의 작업은 비디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미 ‘플럭서스’ 시절에 로보틱스를 실험한 바 있다. 그때 그는 슈야 아베라는 일본인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휴머노이드 〈로봇K-456〉(1963)를 제작한 바 있다. 슈야 아베는 그로부터 몇 년 후 백남준이 사용할 컬러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고안한 사람이다. 백남준이 이미 1960년대 초에 보여준 기술자와 예술가의 공동작업은 오늘날 예술의 안팎에서 일상이 됐으며, 이 경향은 앞으로 더 강화될 것이다.
말년에 그가 시도한 레이저 아트도 ‘비디오 아트’의 범주에 넣기는 힘들다. 죽기 전에 그는 우주 공간으로 레이저를 쏘아 올리는 퍼포먼스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그의 예술적 발상은 지구적 차원의 퍼포먼스였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넘어 우주적 규모에 도달할 뻔 했다. 이 역시 새로운 기술이 열어준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 내에서만 가능한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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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Ⅱ> 201개의 모니터로 된 4채널 비디오 설치, 1220×327×152cm, 1989
굿바이 미스터 백
《한국일보》던가? 그의 서거에 즈음한 사설에서 그의 작업을 귄터 안더스와 연결시켰다. 물론 백남준이 맥루헌의 비판의 영향으로 미디어에 “반격”을 가했지만, 그는 결코 안더스와 같은 비관론자가 아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서울, 뉴욕, 파리를 연결한 TV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플럭서스’처럼 전자의 물결로 존재했던 이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오웰이나 안더스의 기술적 비관주의를 가볍게 조롱했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철학적 문제로 끌어들인다. 《기술과 전향》에서 그는 기술을 한갓 인간의 통제 아래에 놓인 ‘수단’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을 비판한다. 기술은 외려 인간을 지배하는 일종의 ‘숙명’에 가깝다는 것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기술. 수많은 공상과학 영화에 소재를 제공한 이 현대인의 두려움 앞에서 그가 뚜렷한 대안을 내놓은 것 같지는 않다. 그저 기술을 대하는 현존재(=인간)의 태도를 바꿀 것을 요청할 뿐이다.
기술에 대한 현존재의 태도. 하이데거만큼의 형이상학적 비장함은 없어도 이것은 또한 백남준의 주제이기도 했다. 현존재는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물음에 백남준은 하나의 대답을 주었다. 30년 전부터 백남준을 따라다녔던 어느 독일 비평가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테크놀로지를을 사랑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인간화했다.”
아직 저평가된 이 ‘하이 테크네의 광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굿바이, 미스터 백.”
호나야의 비데올로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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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5주기 추모식 및 강연(http://www.artwa.kr/tc/47)
2011년 1월 29일 오후 2시 백남준아트센터
* 최재영 <백남준_굿> 사진展(http://www.artwa.kr/tc/49)
갤러리 아트링크 1. 25 ~ 2. 13
대구 제이원갤러리 1. 28 ~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