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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화가들의영화展

2011/12/25

"없어지기 위해 태어난 그림"
백춘태 김형태 김영준 강천식 김현승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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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강천식김영준김형태백춘태

이번 전시에는 간판 화가로 활동했던 4인(백춘태 김형태 김영준 강천식), 이들의 인터뷰와 간판 제작 과정을 담은 김현승이 참여한다. 김현승의 영상 작품과 전직 간판 화가들이 예전 자신이 작업했던 간판 그림을 모티프로 새로 제작한 작품 총 14점이 전시된다. 김현승은 직접 간판 그림을 그린 경력이 없는 젊은 작가이지만 간판 제작 일이 끊기고 난 뒤 흩어졌던 이들을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으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간판 그림이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하면서, “상업 미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간판 화가들의 삶이 그대로 배어난다는 점에서 더 큰 진정성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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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태<아름다운시절2>265×600cm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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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화가들의 영화>전 전시 전경 왼쪽·김형배 <애마부인>|오른쪽·강천식 <터미네이터> 2011

백춘태, 김형태, 김영준, 강천식은 사제지간으로 얽힌 사이다.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도제식 훈련을 받으면서 간판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배웠다. 허드렛일에서 시작해 배경 칠을 거쳐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얼굴 작업까지 손을 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인기가 좋을 때는 작은 극장에도 5~6명의 도제들이 함께 작업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술을 물려줄 사람이 없다. 간판 화가로서는 마지막 세대인 것이다.

이들 중 백춘태는 1959년부터 2000년대 초, 마지막까지 수제 영화 간판을 고집했던 단성사가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바뀔 때까지 40여 년간 간판 그림을 그려 온 간판 그림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에 따르면 1960년대 외국 영화가 한국에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간판 그림 제작이 물꼬를 텄다.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에는 간판이 영화나 공연의 유일한 광고 수단으로 흥행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했다. 그는 “예전에는 손으로 일일이 그리니 간판마다 그림도 달랐고 사람 냄새, 땀 냄새가 나는 게 극장마다 개성이 있었다”며 “지금은 똑같이 찍어내니 생동감이나 인간 냄새가 안 난다. 낭만도, 간판 자체가 풍기는 맛도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 <장군의 아들>, <서편제>, <애마부인>, <콰이강의 다리> 등 시대를 풍미한 영화의 주요 장면을 모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화업과 간판 그림의 역사를 회고한다.

간판 그림의 생명은 등장하는 배우들을 최대한 닮게 그리는 것이다. 김영준은 이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한국 영화의 간판 작업을 할 때였다. 영화사 측에서 여주인공 원미경이 실물과 안 닮았다고 하는 바람에 달았던 간판을 내렸다가 재작업, 재재작업을 해야 했던 적이 있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 또한 중요했다. 액션, 코미디, 멜로 등 장르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표현 기법을 썼다.

이들이 작업한 간판 그림의 수는 스스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그 간판 그림들은 이제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춘태가 40년 동안 작업한 간판 사진 자료들을 일부 공개한다.) 영화가 종영되면 간판을 내리고 그 위에 흰 페인트로 지운 뒤 새로운 영화의 그림으로 덧씌우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의 노고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미련은 없다. 이런 과정에 너무나 익숙한 그들이다. 백춘태는 “어떻게 보면 간판 그림은 없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초탈한 태도를 내비쳤다.

이번 충무아트홀 전시가 종료될 때 이들의 작품도 모두 흰 페인트로 칠해질 예정이다. 물론 간판을 재활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퍼포먼스 차원에서 하는 일이다. 하지만 보는 이들의 마음이 예전의 그들만큼 초연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아마 더 이상 덧씌워질 그림이 없다는 것, 실제 현실에서도 손 때 묻은 간판 그림이 자취 없이 사라졌다는 헛헛한 사실 때문일지 모른다.

김현승 <사라진 화가들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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