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미술의 ‘첫 페이지’
설렘 가득한 연초, 지금 미술서가는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롭다. 말랑한 에세이와 실용서부터 묵직한 비평집, 이론서까지 흥미로운 신간 6권을 뽑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미술감상의 문턱을 낮춰줄 안내서다. 첫 타자는 미술비평가 홍경한의 『미술 감상 수업』(사람in). 저자는 『경향아티클』 편집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현장 실무와 비평을 겸비한 전문가다. 이번 신간에서는 14세기 르네상스부터 근대미술까지 걸작 50점을 톺아본다. 친숙한 언어로 작품의 역사적 배경과 형식, 의도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미술비평가이자 독립큐레이터 홍예지의 『시각예술가의 글쓰기: 작가노트 쓰는 법』(아름다움)은 ‘작가 노트’ 앞에서 막막해하는 예술가를 위한 실용서다. 다년간 작가들과 나눈 대화를 토대로 작가 노트의 개념과 기능, 기본 구조를 단계적으로 정리했다.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는 법을 제안한다. “작가 노트는 대교가 아니라 ‘징검다리’다. 거창한 다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할 단어도 거창할 필요가 없다. 단순한 돌덩어리 같은 단어면 충분하다.”
예술의 현재와 공적 역할에 대해 날 선 질문을 던지는 비평서도 주목할 만하다. 『예술은 죽었다』(샘터)의 저자 박원재는 원앤제이갤러리 대표이자 미술칼럼니스트로서 미술현장의 안팎을 관찰해 왔다. 그는 본래 삶과 밀착돼 있던 예술이 자본주의, 엘리트주의와 결탁하면서 제도화 및 상품화되었다고 진단한다. 미술관은 예술을 동시대성에서 떼어놓는 무덤이 되었고, 디지털 시대의 NFT는 예술을 투기로 전락시켰다. 예술은 다시 신체와 감각, 경험의 영역으로 복귀해야 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트레이시 에민, 아이 웨이웨이 등 동시대작가의 작업을 매개로 예술이 지닌 연결과 자유의 힘을 분석한다.
미술비평가 장한길의 『남겨진 것: 공적 기억과 예술 언어』(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는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파고든다. ‘SeMA-하나평론상’ 수상자로서 2년간 이어온 ‘2024-2025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결실. 전쟁, 학살, 제국주의, 소수자 혐오 등을 다룬 동시대작품으로 ‘공적 기억’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다. 증언, 영상,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품의 정치적 메시지와 매체의 형식 및 언어 분석을 병행했다. “기억이 오래 남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은 물론 고통스러운 직면이 필요하다.”
(2만 2천 원) 각 출판사 제공
예술가의 치열하고 독창적인 방법론을 담은 책들도 흥미롭다. 『슬기와 민과…질문과』(워크룸프레스)는 시각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의 20년 궤적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들의 작품 900여 점을 재료 삼아 미술과 디자인, 출판의 경계를 횡단한다. 고토 데쓰야, 기디언 콩, 전용완 등 국내외 동료 디자이너와 비평가부터 시인과 드라마작가까지 16인의 필자가 참여했다. 슬기와 민의 작업을 ‘타이포그래피’, ‘언어’, ‘유령 출판’ 등의 키워드로 독해했다.
그레고리 마스의 『다이어리아: 원인, 증상과 치료』(나선프레스)는 아티스트 듀오 김나영&그레고리 마스로 활동해 온 저자의 자기 이론서이자 에세이다. 이들은 일상의 사물과 기발한 서사, 허를 찌르는 농담을 결합해 평면과 입체작품을 제작한다. 신간에서는 ‘프랑켄슈타이닝’, ‘사이코빌딩’, ‘오리피싱’ 등 낯설고 기이한 용어로 지난 20여 년간의 작업 방법론을 풀어냈다. 마스는 창의성이 ‘정신병성’과 연결될 수 있다는 ‘(p)-창의성’ 개념을 제시하면서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태도에 창작의 본질을 숨겨놓는다. “창의성의 논저에는 인지 억제가 부재하며, 이는 비정상적인 사고와 충동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겉보기에 무관한 요소 사이에서 뜻밖의 통찰과 연결을 발견해 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