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사각사각 낙엽 밟으며
예술가의 시선이 스며든 신간 8권을 소개한다. 먼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작가의 편지 99점을 엮은 『이만, 총총: 미술인의 편지』(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를 출간했다. 이 책은 지난 8월까지 박물관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 도록이다. 편지 내용에 따라 ‘정다운 내 사람에게’ ‘미술가의 세계’ ‘부탁의 글’ ‘기억하며’ ‘한 해의 끝자락에서’ ‘봉투의 말’ 등 6장으로 분류했다. 1910~2022년 미술인 사이에 오간 편지의 스캔 이미지와 한글 원문, 해설을 담았다. 1~2쪽 분량의 짧은 서신에서 미술사를 움직인 인적 네트워크를 추정할 수 있다.
미술비평가 심은록의 연구 서적 『화가 김종학』(에디트마이데이)도 나왔다. 387쪽에 달하는 김종학 평론의 결정판이다. ‘설악산 화가’로 잘 알려진 김 화백은 추상을 거쳐 구상으로 전향한 케이스다. 오방색과 핑크 등 대담한 색채의 ‘올오버 페인팅’으로 꽃과 산을 그려왔다. 심은록은 그의 작품을 서울, 도쿄, 뉴욕 등 대도시를 오가던 ‘중시(中市) 시대’, 1979~2014년 설악산에서 작업하던 ‘중산(中山) 시대’, 부산 이주 후부터 현재까지의 ‘중해(中海) 시대’ 세 시기로 구분했다. “김종학의 작품은 디지털 환영과 환각에 점점 빠져드는 우리에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자연과 우주에서 발생하는 환상과 창의력을 시각화한다.”
다음으로 아티스트 에세이 네 권을 소개한다. 페미니즘 아티스트 정정엽이 『콩은 어디든 굴러간다』(이른비)를 발표했다. 정정엽은 팥과 콩을 알알이 그려 거대한 산맥, 바다, 우주를 은유해 왔다. 이번 책에는 30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제작한 풍경 드로잉을 기행문과 엮었다. 작가는 작업과 육아, 살림 같은 사회적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대자연과 이국적 경관 앞에서 비로소 ‘나’를 마주한 시간을 생생히 기록했다. “별이 총총하고 나는 혼자다. 이 호젓함이 조금 외롭지만 쓸쓸하지 않다. 한갓진 마음이 평온하게 넓어진다.”
정정엽이 곡물 같이 작은 존재가 만들어내는 경관으로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했다면, 이피는 신체 부위를 뒤섞은 ‘여성 생물종’을 창조해 기이한 환상의 세계를 표현해 왔다. 그의 에세이집 『이피세』(난다)에는 그림만큼이나 온갖 상상이 혼재된 글 44편이 수록됐다. 1부는 미발표 수필, 2부는 작가가 작품에게 쓴 편지다. 미국 생활에서 아시안이자 여성으로서 감내했던 차별적 시선, 외할머니와의 사별이라는 개인적 아픔 등 예술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겪은 실존적 고민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해외 아티스트의 에세이도 놓치지 말자. 현대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대표 저서 『예술가로 살아가기』(아트북프레스)가 한국어판으로 발행됐다. 그는 영국 개념미술의 선구자다. 현대 산업 사회를 반영한 미니멀 회화, 야외 조형 프로젝트가 대표작이다. 책에는 작업에 관한 메모나 쪽글 등 40년간 예술가로 살면서 쓴 글 150편이 작품과 함께 실렸다. ‘YBA 예술가들의 스승’, ‘예술교육이 자신감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 ‘영국 미술 교육에 가해진 피해’ 등 교육자로서 영국 미술계를 바라보는 관점도 쏠쏠한 재미를 더한다.
기쿠치 노부요시의 『책의 여백에서』(화원)도 한국어판으로 번역됐다. 기쿠치는 일본을 대표하는 북 디자이너다. 1977년부터 1만 5천여 권의 표지를 디자인했다. 30여 년간 아날로그 수작업을 고집해 왔다. 직접 종이를 자르고 붙이고 구겼다 펴서 세상에 하나뿐인 표지를 창안한다. 『책의 여백에서』에는 종이를 포함해 물건 자체를 애호하는 기쿠치의 태도가 녹아있다. “어릴 적부터 사람보다 사물을 더 좋아했다. 하굣길에 나뭇가지나 낡은 쇠붙이 따위를 주워다가 돛단배나 비행기를 만들었던 기억은 있어도 친구들과 뛰놀며 웃고 울었던 추억은 없다.”
마지막으로 리서치에 기반한 아티스트 북 두 권을 추천한다. 미술작가 김화용이 『화성에도 짠물이 흐른다』(타이그레스온페이퍼)를 펴냈다. ‘염전’을 키워드로 서해안의 근현대사부터 인천의 이주민 노동자, 갯벌의 생태계까지 폭넓게 조망한다. 조사 내용과 과정뿐 아니라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 도판, 생태 정치학 키워드를 정리한 색인을 마련해 독자의 폭넓은 이해를 돕는다. 특히 리서치 파트는 서해안의 굴곡진 해안선을 연상하는 독특한 조판 레이아웃으로 디자인해, 심도 있는 학술적 내용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한국의 콜렉티브 리슨투더시티의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 호모 파베르』(리슨투더시티)도 주목받고 있다. 리슨투더시티는 도시의 변화를 기록하고, 재개발과 재난 현장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발굴하는 사회참여 예술을 실천해 왔다.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은 청계천과 을지로를 일터로 삼고 있는 산림동의 제조업 기술자 38인을 인터뷰한 책이다. 재개발에 대한 주변의 인식, 집회와 시위 현황, 정부에 하고 싶은 말 등을 묻고 들었다. 잘못된 도시 계획으로 와해된 산업 생태계를 생생한 목소리로 고발한다. 한편, 프로젝트와 연계한 웹 사이트에는 업체 소개와 인터뷰, 연락망이 게시되어 있다. 도시의 ‘숨은’ 장인을 널리 알리는 창구로 기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