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글쓰기

제니 조, ‘여성회화 글쓰기 총서’ 제1권 발간
2025 / 09 / 08

‘여성회화 글쓰기 총서’는 여성 미술인의 독창적 관점이 담긴 글을 한국어로 출간하는 프로젝트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는 여성 화가 제니 조가 기획했다. 제1권 『에프(f.)』는 유타 쾨터의 실험 소설을 번역한 책이다. 작가이자 기획자인 필자는 문학과 미술을 넘나드는 쾨터의 감각적 글쓰기에 주목했다.

유타 쾨터, 『에프(f.)』(미디어버스, 2만 원)_유타 쾨터는 독일의 화가이자 퍼포머, 음악가, 비평가다. 다양한 뉘앙스의 빨간 회화로 고통, 도발, 욕망, 여성성 등을 표현한다.

유타 쾨터의 소설 『에프』는 말하면서 말해지는 기묘한 언어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라고 말했다. 멈춰 있는 것이 움직일 수 있을까. 회화는 시간이라는 질서에 저항하는 매체다. 쾨터가 문자로 그려내는 사유의 풍경이 회화를 지지체로 삼고 있다면, 이미지를 감각하듯 텍스트를 바라봐도 좋을 것이다. 한편 『에프』는 작가의 퍼포먼스처럼 청각적이고도 촉각적인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접촉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글쓰기의 모델로 쾨터는 백지와 작가, 활자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 『에프』는 1980년대 문화의 최전선에서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회화, 퍼포먼스, 음악, 이론을 종횡무진하던 작가의 목소리와 무의식이 육화하는 장소이다. 책은 고정되지 않은 좌표를 뜻하는 알파벳 ‘f’를 소실점 삼아 소설의 원근법을 “종결하고, 의심하고, 페지한”다. ‘f’는 페티시(fetish) 여성(female) 형상(figure) 살(flesh) 펑크(funk) 분노(fury) 페미니즘(feminism) 허구(fiction)와 같은 단어를 지시하거나 암시한다. 쾨터는 비서사, 분열과 불확실성, 존재의 현시, 탈구축된 경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 앤 카슨을 비롯한 여성의 창작 실천과 주요 문법을 공유한다.

『에프(f.)』 내지.

쾨터의 페르소나인 ‘벤웨이 부인’과 ‘헤르마’의 사물들은 어떻게 그들이 동일시와 고립이라는 이중의 방식으로 세상과 결합하는지 보여준다. 벤웨이 부인은 자신이 수집한 사물을 “봤고, 글로 써내려 갔다. 보는 것이 곧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글로 쓰인 단어는 자기 자신”이라 설명한다. 반면 헤르마의 경우, “그녀가 한 일이라곤 그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뿐이었으며, 그것이 그녀를 비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실제로 쾨터의 빨간 회화는 소설 속 인물의 욕망을 비끄러매는 형식이다. 벤웨이 부인에게 빨간색 튜브, 즉 “회화의 숨은 속내”는 “추상화처럼 그저 순수한 표면”에서도 “팝아트의 더러운 표면”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헤르마에게 빨간색은 어디에 있는가? “표면에도 없고 벽에도 없다. 벨벳이 깔린 바닥에도 없다. 빨간색은 무기 안에 있으며 그 무기는 헤르마다.” 작가는 헤르마의 입을 빌려 작업의 실존적인 양태를 고민했다. “빨간색을 사용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예술이 만드는 사물이 있기 전에 예술을 만드는 사물이 있다. 화가의 모든 사물이 곧 그를 규정한다. “우리는 그녀가 그려지길 바랐어요.” 쾨터는 그가 발견한 사물을 배열하고 조명함으로써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지기를 바랐다. 『에프』의 끝과 시작은 이어져 있다. 회화를 닮은 소설은 처음과 마지막의 흔적을 지운다. “당신이 모든 걸 가지길 바라요.” 한 권의 책은 온전히 이해될 수 없지만, “불안정한 요소를 생산하는 접촉”은 계속될 것이다. 쾨터는 “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붓을 쓴다. 분노로 변할 때까지 사랑한다.” 『에프』를 읽는 사람들은 “영원한 회화의 고통을, 그들이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본다. 여성은 “자신도 모르는 채로 무언가를 부술 수 있다.” 부서지는 것은 견고한 체계이며 여성 그 자체다.

화가의 글쓰기 •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