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읽는 미술신간 8
서점을 피서지 삼는 아트피플을 위해 미술신간 8권을 소개한다. 먼저 ‘아티스트 에세이’ 코너로 가보자. 한국 1세대 추상화가 정점식(1917~2009)의 미술에세이 선집 두 권 『예술의 밀어: 조형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단상』(아트무빙), 『삶의 평형과 예술: 예술과 문화 그리고 자서적 단상』(아트무빙)이 출간됐다. 정점식은 ‘서체 충동’을 추상화에 접목해 한국적 현대회화를 개척했다. 화재(畵才)에 문재(文才)를 겸비한 그는 생전 네 권의 책과 다수의 논고를 남긴 비평가이기도 하다. 이번 두 책은 생전 집필한 글 일부를 엄선한 정점식 평론의 ‘결정판’이다. 『예술의 밀어』는 미술전문가를 위한 심도 있는 조형론, 작가론, 문화론을 엮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따라 희미해지는 한국의 전통을 질박한 미감에서 찾아내는 시도가 돋보인다. 반면 『삶의 평형과 예술』은 일제강점기, 6·25전쟁, 해방공간과 산업화 등 격랑의 시대를 버텨온 자전 수필을 모아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개념미술가 안규철의 그림 에세이도 나왔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현대문학)은 2010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해 온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을 편집한 세 번째 시리즈이다. 미술, 문학, 철학부터 일과 공부, 사람과 사물 등을 사유한 57편의 글이 작가의 오밀조밀한 스케치와 함께 담겨있다. 세계의 이면에서 본질을 탐구하는 안규철의 작업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껍질을 들추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 발밑 마룻바닥 뒷면의 어둠을 응시하는 것은 그래서 불편한 일이다.”
입맛대로 골라 읽기
다음으로 ‘작가론’ 섹션이다. 윤난지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가 『작가는 살아있다: 새 밀레니엄을 연 미술가들』(한길사)을 발표했다. 해체와 혼성 미학이 ‘작가의 죽음’을 선고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있다’라는 아이러니로 재검토한다. 윤 교수는 “1990년대 미술은 한국 동시대미술사를 바꾼 변곡점이다. 내가 겪은 시대를 역사적 거리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글로 남겨야 한다.”라는 자각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밀레니엄 전환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한국 동시대미술의 새 지평을 연 작가 20인의 개별 작품론을 수록했다. ‘그리기의 시작과 끝’, ‘경계 넘나들기’, ‘말하는 미술’, ‘가장자리 미학’, ‘유토피아 너머’ 등 5개 장으로 나눴다. 각 작가의 1990년대 작업을 그 이후의 미술 경향과 비교 해설했다. 현장 비평과 미술사를 가로지르는 분석의 틀이 책의 백미다.
더 가까운 시간대의 작가론 서적도 출판됐다. 『대화 비평: 탈정체화의 예술과 미술비평』(현실문화)은 평론가 양효실이 지난 10여 년간 시각예술 현장에서 만난 작가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썼다. 회화 설치 퍼포먼스 퀴어 공동체 등 매체와 주제를 넘나드는 45인의 작가론이 동시대미술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그린다. “비평가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이다. 나는 판단하지 않은 채 듣는다. 최초인 것처럼 듣는다. 놀라면서 듣는다.” 신간의 포인트는 ‘경청’이라는 비평가의 태도에 있다. 지식의 잣대로 작업을 재단, 왜곡하지 않고 대화의 산물로 비평을 정의했다는 점에서 포용과 겸손의 미덕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키워드’별 해설서를 추천한다. 미술연구자 최광진이 『현존의 아름다움: 미술로 보는 한국의 평온미』(현암사)를 펴냈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15년 동안 출간해 온 ‘한국의 미학과 미의식’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다. 신명, 해학, 소박편에 이어 이번에는 ‘평온’이라는 미의식으로 한국 미술사를 다시 읽었다. 고대 불교조각부터 고려불화, 조선문인화,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작품으로 구현된 평온의 정서를 짚어낸다. 형식이나 주제가 아닌, 구체적 감수성으로 한반도 미술을 해석해 우리 문화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아트마켓에 관심을 둔 독자에겐 고동연의 『아트 컬렉터의 시대: 글로벌 미술시장의 역사와 지금』(다할미디어)을 권한다. 이 책은 컬렉터를 풍향계 삼아 미술시장이 본격 형성된 16세기 네덜란드부터 19세기 파리 화랑, 20세기 미국 슈퍼 컬렉터, 21세기 페어와 경매 등을 거시적으로 읽어낸다. 책은 ‘작품을 구매하기 좋은 시즌이 따로 있는가’, ‘작품 구매에 앞서 확인할 것은 무엇인가’, ‘구매 후 법적인 이슈와 보관은 어떻게 하는가’ 등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 답변으로 끝나 아트컬렉팅 입문자에게 톡톡한 길라잡이가 되어준다.
디자인연구자 전가경의 『그래픽 크리틱: 1970년대 이후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출판, 그리고 행동주의』(안그라픽스)도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의 그래픽디자인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타이포그래피, 출판, 행동주의라는 세 관점으로 답변한다. 문자 조형이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 다뤘다. 시각 문화 생산자로서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며 자기 주도적 작업 방향을 제안한다. 책에는 1950년대부터 올해까지 생산된 포스터, 팸플릿, 잡지, 단행본 등의 이미지가 다채롭게 수록돼 한국 디자인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