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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떠오르는

제주포도뮤지엄,디아스포라주제전<그러나우리가사랑으로>

2022/09/08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7. 5~2023. 7. 3)전이 열렸다. 전시 주제는 ‘디아스포라’.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조명하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공존과 포용의 의미를 재고한다. 목숨 걸고 국경을 넘는 난민부터 여러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이민자까지, 새로운 터전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움직임을 들여다본다. 특히 전시는 국적, 비자, 체류 허가 같은 개념이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국민과 외국인, 합법 거주자와 불법 체류자,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근원인 ‘경계’부터 고찰하려는 의도다. 권력이 규정해 놓은 경계로부터 신체적, 심리적 소외가 발생하므로. 포도뮤지엄 디렉터 김희영은 “전시는 ‘우리가 만든 약속과 믿음이 혹시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구분되기 이전에, 하나의 별에서 함께 사는 생명으로서 우리가 가진 수많은 공통점을 상기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딘가에서 이방인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전시에는 작가 총 7인(팀)이 참여해 기존 대표작 및 신작을 선보였다. 그 라인업은 강동주, 이배경, 정연두, 리나 칼라트, 알프레도&이자벨 아퀼리잔, 요코 오노, 우고 론디노네 등으로, 한국 젊은 작가부터 중견 작가,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까지 다양하다. 또 작품뿐 아니라 5개의 테마 공간을 기획해 다채로운 볼거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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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론디노네<고독한단어들>발포고무, 에폭시수지,패브릭가변크기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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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이자벨아퀼리잔<주소>개인오브제소지품50×50×50cm(140개)2008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이제 그 구성을 자세히 살펴보자. 포도뮤지엄 파사드에 설치된 우고 론디노네의 <롱 라스트 해피>가 관객을 제일 먼저 반긴다. ‘LONG LAST HAPPY’라는 문구의 이 무지갯빛 네온은 관객마다 생각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어디에 뜰지 모르는 무지개처럼 행복은 고정되지 않은 곳에서 마음의 상태를 따라 생겨날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첫 번째 테마 공간 <이동하는 사람들>이 방을 가득 채운다. 반투명한 장막 뒤로 끝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을 촬영한 프로젝션 설치물이다. 표류하는 난민, 축제 행렬, 공항 터미널 풍경,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의 은유 등으로 읽히는 이 대열에서 사람들의 생김새는 모두 실루엣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인종, 성별, 나이, 직업이라는 꺼풀이 벗겨진 자리에서 관객은 자신과 닮은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너와 나,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그다음 방에는 이배경의 <머물 수 없는 공간>이 유사한 감성을 이어나간다. 하얀 육면체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6채널 영상작품. 망망대해 같은 시공이지만, 육면체들은 서로의 손을 잡은 덕분에 섬이 아니라 물결이 될 수 있다.

이어지는 전시장에는 테마 공간 <디파처보드>와 <아메리칸드림 620>, 리나 칼라트의 <짜여진 연대기>가 한눈에 펼쳐진다. 여객 터미널의 전광판을 본뜬 <디파처보드>는 항공편이나 출발 시각 대신 전쟁 실향민의 독백을 60개 문장으로 띄운다. “약을 달라고 하면 너희 나라로 가라고 해요”,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죽은 이들이 어디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등 생생한 삶의 증언이 눈앞에 반복해 나타난다. <아메리칸드림 620>에서는 러버덕이 줄지어 배치됐다. 원래 아기가 목욕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지만,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 망명 신청자들이 620km에 달하는 ‘죽음의 사막’을 건너면서 후발 주자가 헤매지 않도록 떨어트리고 간 이정표이기도 하다. 두 테마 공간 옆에 걸린 대형 세계 지도 <짜여진 연대기>는 이주 노동 경로를 색색의 전선으로 엮어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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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사진신부>사탕수수,목재, 폴리카보네이트,LED조명,PVC튜브관수시스템, 2채널비디오,컬러,사운드365×325×1,200cm 28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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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오노<채색의바다(난민보트)>보트,수성페인트,작가요청문가변크기1960/2022

다음으로 알프레도&이자벨 아퀼리잔의 <주소>, 강동주의 <땅을 딛고 바다를 지나>, 정연두의 <사진 신부>가 등장한다. <주소>에는 부부 아티스트가 2006년 필리핀에서 호주로 이민한 경험이 담겼다. 개인 물품이 담긴 상자 140개를 쌓아 올린 작품으로, 각 상자의 크기(50×50×50cm)는 필리핀에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소포 규격을 뜻한다. <땅을 딛고 바다를 지나>는 작가가 제주의 항구 44곳을 방문해 땅의 요철을 먹지에 옮겨 그린 드로잉 연작이다. 떠나는 이와 머무는 이의 교점에서 이동과 연결을 다시 생각한다. 정연두는 20세기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조선인 노동자의 역사를 소환한다. 낙원을 꿈꾸며 떠났지만 혹독한 타향살이를 겪은 이들의 삶은 제주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워크숍으로 재구성됐다. 전시장에 놓인 비닐하우스에는 작가가 직접 재배한 사탕수수와 워크숍 기록 영상이 비치됐다.

전시 후반부에는 테마 공간 <주소 터널>과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요코 오노의 <채색의 바다(난민 보트)>가 설치됐다. <주소 터널>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고향 주소와 생년을 어두운 터널에 별자리처럼 수놓았고, 전시와 동명의 애니메이션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에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스토리가 담겼다. <채색의 바다(난민 보트)>는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인기가 가장 많았다. 작가는 새하얀 방에 흰 보트와 파란 물감을 두어 관객이 직접 바다를 그리게 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소외와 적막도 희망찬 푸른빛으로 가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는 우고 론디노네의 <고독한 단어들>로 마무리된다. 꿈, 울음, 한숨, 낮잠 등 단어를 의인화한 피에로 마네킹 27개가 무지개 햇볕을 쬐며 전시장에서 휴식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현란한 복장을 갖췄지만 우울한 표정이고, 한곳에 모여있어도 섬처럼 떨어져 고독해 보인다. 이 군도를 연결해 줄 사람은 오직 관객뿐이다. 저마다의 보트를 타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촘촘히 연결하면 우리는 문장과 문단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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