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 도시’는 살아있다
‘부산모카 플랫폼’은 부산현대미술관의 연례전이다. 그 세 번째 시리즈 <나의 집이 나>(2025. 11. 29~3. 22)전이 개막했다. 올해 주제는 ‘지속 가능한 도시’다. 인구 감소, 지역 소멸, 고령화 등 도시의 사회 문제를 건축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작가, 건축가, 연구자 등 다학제로 구성된 10팀이 관객 참여형 파빌리온을 선보였다. 필자는 ‘더 파일룸’ 멤버로 참여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느낀 소회와 이번 전시의 의의를 밝혔다.
“그래서 작품으로 문제 제기만 하고 해결책은 없는 건가요? 그건 무책임한 게 아닌가요?” 기자 회견에서 받은 질문이 날카로웠다. <나의 집이 나>전에 더 파일룸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몇 주간 영도를 오갔다. 리서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주민은 예상했던 모습과 달랐다. 영도는 부산에서도 노령화 1순위인 데다가, 인구 감소로 가장 ‘문제시’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정작 주민은 영도를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천천히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기자의 질문에 모든 게 무력해지는 것 같았다. 숫자와 금액, 공실률와 인구 통계로만 재단하는 시선 앞에서 사람들의 의지는 낙관적인 감상처럼 여겨졌다. 더 파일룸이 작품에 담으려 했던 현상들, 느린 시간과 다른 시선, 비인간 생명체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폐조선소와 빈집,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전시는 부산현대미술관이 2023년부터 이어온 연례전 ‘플랫폼’의 세 번째 시리즈다. 첫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작년에는 ‘인간과 인공 지능의 경계’를 다뤘다면 올해는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기획 의도는 명확하다.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이를 ‘쇠퇴’가 아닌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건축가, 작가, 이론가로 구성된 10팀이 참여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전시장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도시를 읽는 다른 문법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연출됐다.
예술은 도시를 구할 수 있는가
출품작은 크게 두 질문으로 수렴한다. 누구의 시간으로 도시를 보는가, 그리고 어디까지를 ‘집’이라 부를 것인가. 먼저 공감각의 <변화하는 도시, 다시 쓰이는 삶>(2025)은 비계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삐걱거리는 발판을 밟으며 걷다 보면 부산 원도심의 소리가 들려온다. 비계는 짓거나 허무는 중인 건물의 임시 구조물이다. 완성도 폐허도 아닌 중간의 시간, 그 불안정한 구조 위를 걷는 게 이상하게도 안심을 준다. 도시가 완성된 실패작이 아니라 여전히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더 파일룸의 <댓츠 마이 네이버>(2025)는 시간의 문제를 비인간의 시선으로 확장한다. 영도 폐조선소의 녹슨 철근, 담벼락에 낀 이끼, 하구 생물, 빈집 등 평소 눈길이 닿지 않던 존재를 관찰하며 제작한 영상과 출판물, 그리고 영도 주민의 삶이 축적된 문을 수집해 설치한 구조물로 구성됐다. 인간이 ‘쇠퇴’라고 부르는 시간이 다른 존재에게는 ‘도래’일 수 있다. 누구의 시선으로 도시를 보느냐에 따라 문제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쇠퇴는 관점의 문제고, 인간 중심의 시계만이 유일한 시간은 아니다.
리슨투더시티의 <임장크루-갭투-초품아-마피-강남불패: 지역소멸과 욕망의 도시>(2025)는 시간의 왜곡을 더 구체적으로 포착한다. 팀은 지역 간 부동산 불평등에 관한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게임과 설치, 부동산 신조어 용어집 등을 제작했다. ‘임장크루’ 같은 기형적인 단어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며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긴다. 부동산 과열은 단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집과 도시를 바라보는 시간의 속도 자체를 왜곡했다. 느리게 살아가는 삶의 주기는 빠른 투자 수익, 갭, 시세 차익이라는 언어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집은 무엇인가? 강해성, 문소정, 한경태의 <이동하는 모듈러 만물상>(2025)은 집의 조건을 다시 묻는다. 작가들은 트럭 위에 모듈러 구조물을 싣고 부산 곳곳을 누비며 주민의 이야기와 버려진 가구를 수집하고, 이를 설치와 영상으로 구현했다. 여기서 집은 주소지가 아니라 돌봄이 닿는 거리이며, 고정된 건물이 아닌 움직이는 관계다. 이는 빈집이 늘어나는 골목에서 집의 의미를 다시 쓰는 시도다.
다른 출품작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포자몽의 <마이코셀 유니버스: 균류와 인간의 공존>(2025)은 부산 원도심 공실률 데이터를 활용해 살아있는 균사체로 뒤덮인 구조물을 만들었다. 인간이 떠난 자리에 다른 존재의 점유 가능성을 상상하게 했다. 서울퀴어콜렉티브의 <우리는 모두 팔십에 서로의 요양보호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2025)는 서로 등지고 교차하는 여러 개의 의자로 제도 밖 돌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유림도시건축의 투명한 터널 작품 <인피니트 루프: 도시연대기>(2025)는 비움 속의 호흡을, 주현제바우쿤스트의 폐자재 구조물 <콘크리트 유토피아>(2025)는 버려진 것의 재생을, 랩.WWW의 종이접기 구조물은 함께 짓는 공동체를 실험했다.
다시 기자 회견으로 돌아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예술은 도시를 구할 수 없다고. 문제는 해결책의 부재가 아니라 질문 자체라고. 성장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축소를 실패로 단정하며, 느리게 축적해 온 삶의 시간을 무의미하다 치부하는 폭력적인 시선 말이다. 정책도 예산도 제도도 아닌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질문 자체를 의심하는 일이다.
영도 담벼락의 이끼는 지금도 느리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 느린 시간으로 도시를 바라볼 수 있다면, 축소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단 한 번의 전시로 알 수는 없다. 이번 전시는 그 이름을 함께 찾아갈 수 있는 작은 틈을 열어두었다. 답을 내놓지 않는 게 무책임한가? 오히려 견고해 보이는 논리에 틈을 내는 일이야말로 예술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책임 있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