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의 조각
김인겸(1945~2018)은 한국 현대조각의 새 지평을 연 선구자이다. 고전 조각의 어법에서 벗어나 평생을 ‘조각 같지 않은 조각’에 천착했다. 그의 조각은 선과 면, 평면과 입체, 실재와 환영을 가볍게 넘나든다. 최근 김인겸의 회고전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3. 6~4. 19)이 우손갤러리 대구에서 열렸다. 전시명은 프랑스 미술평론가 기 부아이에(Guy Boyer)가 쓴 작가론에서 따왔다.
김인겸은 1965년 홍익대 조각과에 입학해 70년대 실험미술을 모색하는 시기를 보냈다. 전통조각의 재료인 청동과 대리석에서 벗어나 아크릴, 석고 등 색다른 재료를 탐구했다. 80년대에는 한옥, 사찰, 왕릉 석탑 등 전통 건축의 구조를 유심히 관찰하고, 이를 현대미술의 조형에 접목한 <묵시공간>을 발표했다. 1992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공개한 <프로젝트-사고의 벽>은 당시 국내 미술계에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이 작품은 녹슨 철판을 용접해 미로 같은 12개의 방과 구조물을 만든 장소특정적 조각으로, 작가 자신이 ‘한국 설치미술의 시작점’이라 자부했다. 1995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첫 대표 작가로 참여해 <프로젝트21-내추럴 네트>를 선보였다. 이듬해 한국인 최초로 퐁피두센터 아틀리에 입주 작가로 초대받아 2004년까지 파리에서 활동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40여 년 예술여정 중 특히 파리 시기에 집중한다. 스퀴즈로 그린 <Space-Less>와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Emptiness> 연작이 출품되었다. 작가는 파리 체류 시절 스펀지나 스퀴즈를 이용해 종이에 먹으로 과감한 드로잉을 제작했다. 타향살이의 물리적, 경제적 여건이 작업에 큰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종이접기라는 놀이를 조각의 언어로 재해석했다. 김인겸에게 손으로 종이를 접는 행위는 곧 공간을 창조하는 마법이었다. 종이는 얇은 평면일 뿐이지만, 단 한 번만 접어도 스스로 3차원에 서있는 입체가 된다. “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을,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빈 기분이다.” <Space-Less>와 <Emptiness>는 매체도, 재료도 다르지만, ‘접힘’과 ‘중첩’의 방식으로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스퀴즈의 움직임에 따라 <Space-Less>에 ‘조각된 잉크’는 현실에서 <Emptiness>의 ‘접힌 철판’이 된다. 평면과 입체의 아이러니한 공존이다. 종이를 접은 듯 납작한 조각과 다차원으로 확장해 가는 매스(mass)의 종이…. 김인겸의 예술은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초월의 조각이다. 한편, 이번 개인전에는 <프로젝트-사고의 벽>과 <프로젝트21- 내추럴 네트>의 영상 및 아카이브 자료도 함께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