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비친 자화상
화가 정보경. 그는 거침 없는 붓질과 격정적인 색으로 자신의 내면을 인물 초상과 사물에 투영해 왔다. 그가 개인전 <사유를 앞질러>(6. 19~7. 5 오엠지)를 열었다. 유리, 금속, 플라스틱 등 매끈한 원판에 그림을 그리고 찍어내는 모노타입 기법을 시도했다. 작가를 만나 전시의 주제와 작업의 변화, 그리고 새롭게 선보이는 판화적 실험에 대해 물었다.
Park 2019년 이후 밝은 분위기의 꽃과 실내 풍경에서 인물화로 작업의 주제를 옮겼다. 계기가 있다면?
Joung 꽃과 실내 풍경 작업은 욕망, 상처, 유년 시절의 기억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업이었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외면했던 가족사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직면했고, 이를 작업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외가 식구들을 만나며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그동안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나의 뿌리가 그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위로를 받았다. 인물화는 나를 중심에 두었던 시선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 공감의 감각을 느끼게 된 계기다.
Park 이전 작업의 강렬한 색채와 빠른 붓질이 ‘감정의 분출’이었다면, 최근 전시작들은 감정이 빠져나가 비워진 상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Joung 개인전 <어미, 화가>(플랫폼엘 2022) 이후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당시 작업은 정치적 의식과 사회적 질문, 개인의 감정이 과하게 들어가 관객에게 주제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업의 즐거움도 사라지면서 방황했다. 나는 오랫동안 많이 그려야 하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 시간과 작업이 있었기에 지금의 작품들이 나온 것은 맞지만, 어느 순간 작업이 나를 증명하려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때 처음으로 힘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시를 멈춘 채 자신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 무렵 판화 공방에서 모노타입을 접했다. 40~50분 안에 작업을 끝내야 하고 결과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모노타입의 특성이 오히려 자유를 주었다. 실패에 대한 걱정 없이 우연한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졌다. 의도했다기보다 매체 자체가 가져온 자연스런 변화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사유를 앞질러’도 그러한 모노타입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Park 한동안 인물화를 통해 정체성을 탐구하다 최근 모노타입 작업에서 다시 꽃, 화병, 인형 등의 형상이 등장한다. 다시 만난 사물들은 이전과 어떻게 다른 의미를 지니는가?
Joung 이번 모노타입에 등장하는 사물과 인물은 실제 대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당일의 감정과 상태에 따라 직관적으로 그려낸 상상의 이미지다. 예전의 꽃이 욕망이나 특정 감정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의 사물은 무의식에 가까운 형상이다. 작업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모아놓고 보니 결국 내 안의 감정과 기억의 흔적들이더라. 지금은 사물과 인물을 구분하기보다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얼굴을 그리지 않더라도 결국은 내 안의 감각과 상태가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Park 모노타입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실험적으로 사용했던 매체이기도 하다. 캔버스에 직접 그리는 회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Joung 처음에는 판화의 특성보다 새로운 시도 자체에 흥미가 있었다. 홀로 작업하던 공간에서 벗어나 공방의 사람들이 내뿜는 긍정적인 활기와 우연성에 기반한 매체의 살아있는 에너지가 즐거웠다. 회화는 오랫동안 혼자 하는 작업이기에 자유롭지만, 동시에 쉽게 고립되기도 한다. 반면 공방에서는 테크니션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함께 기뻐한다. 그런 경험이 나에게 굉장히 큰 응원이 됐다. 또 모노타입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작업해야 하므로 빠르고 직관적이다. 동일한 압력과 잉크를 사용해도 결과는 늘 달라진다. 돌발적이고 우연한 효과들은 회화에서 경험하지 못한 신선함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우연성이 낯설었지만, 점차 그것을 실패가 아니라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결과를 완벽히 통제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점이 가장 큰 해방감을 줬다. 회화에서는 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는데 모노타입은 그 욕심을 내려놓게 했다. 이제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기대하게 된다.
Park 인물화가 아니라 사물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는 방식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한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고스트 프린트(Ghost Print) 작품 설명을 부탁한다.
Joung 인물화는 얼굴이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꽃병이나 인형, 고스트 프린트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투영한다. 고스트 프린트는 첫판을 찍고 남은 20%의 물감으로 찍어내는 기법으로, 잔여량을 예측할 수 없어 순간의 판단이 필요하다. 원판에서는 꽃처럼 보이게 하려고 선을 그리고, 특정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붓질을 한다. 그런데 한 번 찍어낸 뒤 다시 남은 잉크로 찍어낸 고스트 프린트에서는 원래의 의도나 기교가 거의 사라진다. 대신 붓의 압력 차이나 기포 자국, 우연히 생긴 흔적이 드러난다.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보다 의식하지 못한 움직임이 드러나는 지점이 매력적이다. 오히려 얼굴을 그린 자화상보다 더 본질적이고 솔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인물화뿐만 아니라 사물도, 고스트 프린트도 결국 내 안의 감각이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 결과물이다.
Park 추후 작업에 시도하고 싶은 주제가 있을까?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다.
Joung 최근의 관심사는 ‘형체가 없는 심상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을까’이다. 그동안 슬픔, 불안, 욕망 등의 감각을 인물과 사물로 표현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형상을 거치지 않고 감각과 정서 자체를 드러내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추상이나 설치작업도 고려하고 있다. 익숙한 회화의 틀을 벗어나 낯선 매체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작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