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그랑! 감각의 해방
OCI미술관에서 조효리의 개인전 <Horizontal Cocktail>(8. 29~10. 9)이 열렸다. 신작 회화, 설치, 영상 등 1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여러 종류의 액체가 섞이는 칵테일을 모티프 삼아 유기성과 순환성의 개념을 탐구했다. 그에게 액체란 담기는 용기의 형태와 부피에 따라 달라지는 물질이다. 작가는 액체의 가변적 성질에서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시간의 비선형성을 포착했다.
조효리 <Gravity>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160cm 2024
조효리는 2020년경 데뷔 때부터 한국의 차세대 젊은 작가로 주목받아 왔다. 그간 그의 작업은 가상과 현실, 입체와 평면, 물질과 환영 등 주로 작업 방법론과 매체 실험법, 회화의 성립 조건에 연관해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3D 프로그램에서 구현한 비현실적 시점을 회화로 옮기거나, 다양한 미디엄과 프레임을 적극 활용하고, 건축적으로 평면을 설치하는 등의 작업 과정과 방식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회화라고 정의된 범주와 감각 방식의 안팎을 건드리는 ‘메타 회화’로 다수 소환되었다. 회화에 ‘대하여’ 말하는 조형 언어가 더 드러났다. 그러나 조효리는 특유의 문법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소설로 치자면 중심 내용과 인물의 태도는? 작품의 바깥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차원이 열린다.
21세기 센티멘털리티
조효리의 그림처럼 차창에 굵은 빗방울이 흐르던 날, 인터뷰로 처음 만난 그와 세 시간을 훌쩍 넘게 보냈다. 작업실에는 프리즈 서울 참여와 개인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지난여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9월 골든 위크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비운 시간이었지만, 대화는 엉뚱한 데로 튀었다. 서로 영화를 추천하고, 플레이 리스트를 공유하며 뜻밖의 ‘힐링 타임’을 가졌다. 그 잡다하고 소소한 수다에서 얻은 건 조효리의 작업이 의외로 일상과 감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다시 그림을 들여다봤다. 디지털 스크린 출신의 차가운 물성, 에어브러시의 평평한 질감 아래에는 분명 서정적인 감수성이 흐른다. 일렉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통기타 사운드처럼···. 조효리 회화를 읽는 중요한 단서는 ‘센티멘털리티’이다.
조효리 <Horizontal Cocktail> 캔버스에 아크릴릭, 종이 160×160cm(한 점당) 2024
그 감각의 낙차는 어디에서 올까? 세 가지 이유를 짚는다. 첫째, 풍경의 역습. 조효리 작업에는 광활한 대자연이 종종 등장한다. 이번 개인전의 메인 작업 <Horizontal Cocktail>은 두 피스로 이뤄져 있는데, 울컥 쏟아지는 칵테일 뒤로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낮과 밤이라는 서로 다른 두 시간대가 수평선을 공유하며 데칼코마니처럼 맞붙어 있다. 전시의 유일한 설치작업인 <Cheers!>에도 억센 번개가 고원과 강물에 내리꽂힌다. 비현실적인 자연뿐 아니라, 일상의 잔잔한 단면도 배경이 된다. 작가는 분위기가 일순간 확 반전되는 장면들에 끌린다고 말한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만드는 드라마틱한 찰나, 또는 마음에 멜랑콜리한 요동이 일어나는 순간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조효리 회화는 일종의 ‘풍경화’이다. 풍경의 인문학을 연구한 서경채 교수에 따르면,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거나 놀라운 경치가 아니다. 한 장소에서 어떤 힘이 요동칠 때 터져 나오는 떨림이다. 풍경이란 한 사람의 마음속 장소가 그 자신과 격렬하게 부딪힐 때 생기는 ‘상태’이다. 작가는 특정 공간에 대한 심리적 경험에서 출발해, 그 감성을 다시금 회화로 꺼낸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낭만적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조효리 <The Boy Who Swallowed a Star_2>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16.8×91cm 2024
둘째, 은유된 관계. 조효리 회화에는 구체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작업의 출발이 되거나, 관계에서 오는 감정 상태가 은근슬쩍 투영돼 있다. <I’m Stuck on You>가 대표적이다. 두 개의 투명한 꽃병과 노란 꽃이 겹친 장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푹 빠진 연인 사이를 암시한다. 또한 에이라운지와 함께 나간 프리즈 서울 ‘포커스 아시아’의 부스도 대도시의 찐한 사랑을 연상하게 꾸며졌다. 바닥의 맨홀 뚜껑 조각에는 레진으로 만든 빗물이 고여있고, 시든 나뭇잎과 비벼 끈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나뒹군다. 벽에는 차 안에서 본 비 내리는 밤 풍경 등을 그린 회화가 설치됐다. 어둑한 거리, 서늘한 날씨, 짙은 담배 냄새는 그 배경의 주인공들을 상상하게 이끈다. 더 나아가, 조효리의 작업에서는 물건 이미지가 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묘하게 대리하고 있기에 모종의 ‘페티시즘’을 자극한다.
셋째, 장르적 번역. 작가는 문학, 영화, 음악 등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시각 이미지로 재해석해 왔다. 대형 신작 <해방>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독수리」를 직접적으로 인용한다. 독수리가 주인공의 목을 관통해 죽음에 이르게 한 순간, 그는 도리어 해방감을 느꼈다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회화로 옮겼다. 검은 새가 투명한 칵테일 잔을 날카로운 부리로 깨부수는 그림으로 그 안에 담긴 액체, 즉 시간에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이 외에도 작가는 워쇼스키 형제,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 등의 영화와 음악에서도 단초를 얻었다. 그는 인접 장르를 직역, 의역, 오역하며 감각의 진폭을 확장하고 있다. 조효리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동요하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감정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의 유리잔에 담긴 건 액체라는 물질이 아니라, 칵테일에 적당히 취기가 들떴던 사람의 ‘마음’일지 모른다. / 김해리 선임기자
조효리 / 1992년 대구 출생. 홍익대 회화과 학사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갤러리아노브(2021), N/A(2020)에서 개인전 개최. <히스테리아>(일민미술관 2023), <내추럴 레플리카>(김희수아트센터 2023) 등 단체전 참여. 서울에서 거주 및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