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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조각’의

P21,조각가최태훈개인전<필드>

2023/07/07

<살(SAL)-P1> 우레탄 폼, 담요, 커튼, 매트, 베갯잇 310×356×298cm 2023

<살(SAL)-P1>우레탄폼,담요,커튼,매트,베갯잇310×356×298cm2023

최근 한국 미술계의 중요한 화두로 ‘조각’이 떠올랐다. 장르의 ‘죽음’을 점치던 종래의 예견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20세기 후반, 모든 경계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로 현대조각은 ‘입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회화 사진 퍼포먼스 영상 등 타 장르와의 이종 교배를 급속도로 진행한 조각은 설치 장르로 흡수되는 듯했다. 그러나 조각적 인식과 태도, 재료와 기법을 고민하는 조각가는 건재했다. 2020년대, 마침내 한국 동시대미술계에 조각이 ‘귀환’했다. 최태훈은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 서있는 젊은 조각가다. 그가 P21에서 2부작 개인전 중 첫 순서인 <필드>(6. 9~7. 1)를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간 자신의 조형 언어로 구축해 온 ‘살(SAL)’의 개념을 공간 차원으로 확장하고 대형 조각을 공개했다.

물질의 자생력, 이종의 조각

본래 조각은 재료를 고르는 일부터 작업인 ‘소재’의 예술이다. 나무, 돌, 점토, 브론즈 등의 전통 재료든 플라스틱, 시멘트, 패브릭 등의 산업 재료든 수많은 물질 가운데 무엇을 소재로 택하느냐에 따라 제작 기법, 표면 질감, 볼륨과 형태 등 많은 요소가 결정된다. 이런 이유로 조각 과정을 ‘재료와의 격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조각에는 재료와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최태훈 조각의 재료 약사(略史)를 살펴보면 이렇다. 2012~16년 작가는 일상 사물을 조각으로 변환했다. 쓰레기통, 쓰레받기, 빗자루 등의 시퍼런 청소 용품을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기념비> 형태로 쌓아 올려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성 조각으로 탈바꿈하거나(<올인원실내청소도구>), 냉장고, 컴퓨터, 모니터, 스트레칭 기구 등 가정용 사물을 부모님의 행동 양식에 맞추어 개조했다(<멀티태스킹 디바이스>). 그럴싸하게 ‘쓸모 있는’ 사물의 탈을 썼지만, 실은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무용한’ 조각이었다.

2017년경, 작가는 이케아 가구를 재료로 택한다. 이케아는 원가 절감을 위해 구매자가 직접 부품을 조립하는 DIY 정책을 편다. 최태훈은 이케아 가구의 유닛을 기업이 제공하는 설명서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구성하는 DIY 해킹을 시도했다. 이때 그는 네 가지 ‘셀프 룰’을 세웠다. ① 스스로 직립할 것 ② 모든 방향에서 형태가 다를 것 ③ 어디서 보아도 완성도가 균질할 것 ④ 오브제를 재가공(절단, 절곡 등)하지 말 것. 바꿔 말하면 볼륨과 매스, 비균질/탈용도의 형태, 조형적 마감도, 원재료 부각이 사물을 조각으로 바꾸는 최소 조건이었다. 작가는 사물과 작품, 기능과 감상, 구상과 추상, 사용자와 창작자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각의 성립 요건을 탐구했다. “물건을 조각화하면서 형태적으로, 의미적으로 해방시킨 느낌이었다. 마치 가구가 되어야 할 사물의 운명을 예술작품으로 바꿔주듯. 그러고 보니 사물이 나름의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자생’하길 바랐다.”

2021년 최태훈은 건축용 우레탄 폼을 주 재료로 들여왔다. 작가는 이 새로운 재료와 어떤 격투를 펼치고 있을까? 사실 그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 우레탄 폼은 발포한 순간부터 몸집을 쿵쿵 부풀리기 시작해 경화하는 데까지 1분 남짓 걸린다. 완성형을 예상할 수도, 유도할 수도 없는 ‘통제 불가’의 재료이다. 작가는 그저 소재가 알아서 형태를 갖추어 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과거 자신이 세운 원칙에 따라 DIY 제품을 조립해 나가던 이케아 가구 시리즈의 논리적 조형법과는 다소 멀어진 모습이다. “액상 우레탄 폼은 원료와 안료를 배합하는 와중에 경화가 시작된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며 자기 마음대로 굳는다. 이에 맞춰 나도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우레탄 폼의 우연한 성질이 일종의 생명감을 준다. 내 작업에서 중요한 건 특정한 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아니라 프로세스 자체이다.”

<살(SAL)-P1> 우레탄 폼, 담요, 커튼, 매트, 베갯잇 310×356×298cm 2023

<살(SAL)-P1>우레탄폼,담요,커튼,매트,베갯잇310×356×298cm2023

최태훈 개인전 <살(SAL)-P2> 전경 2023 P21

최태훈개인전<살(SAL)-P2>전경2023P21

우레탄 폼으로 제작한 작품 연작에 그는 <살(SAL)>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여기서 ‘살’은 조각의 뼈대(bar), 표면(skin), 부피(mass) 등의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이번 <필드> 전시에서 최태훈은 우레탄 폼이 전시장을 채우다 못해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살(SAL)>(2023)을 공개했다. 이는 공간에 반응한 장소특정적 설치처럼 보이나 실은 형상 조각을 만드는 소조의 개념에서 출발했다. 두 개로 나뉜 P21의 전시 공간을 소조에 사용되는 ‘심봉(心棒)’으로 상정하고 마치 막대기에 흙을 덧대어 붙이듯 전시장에 우레탄 폼을 양껏 투하했다. 또한 소조를 제작할 때 흙끼리의 점착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노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샤워 커튼, 담요, 이불 등 이케아의 패브릭 제품을 부드러운 관절처럼 활용했다. 그렇게 전시장은 패브릭과 우레탄 폼으로 빚은 일종의 개념적 ‘형상 조각’이자 허공을 재료로 끌어온 ‘공간 조각’이 된다. 공간이 조각이 된다면, 관람은 조각의 내부로 들어가는 경험일 터. P1 공간의 통유리창에 흘러내리는 우레탄 폼을 밀착시킨 점 역시 조각의 단면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관객은 전시장 안팎을 다니며 조각의 외부와 내부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조각이 좌대에서 내려와 공간으로 나아가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지만, 나는 공간을 전통 기법으로 재해석해 조각을 다시 미술의 장으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전시 제목이 ‘필드’인 이유이다.”

2부작 개인전의 두 번째 챕터인 <톤>(7. 4~22)에는 비교적 소형인 프리 스탠딩 조각작품이 출품된다. “<톤>에서는 ‘자생’과 ‘이종’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하다. 공통점이 없지만 결이 유사한 무언가들이 만드는 불협의 ‘티키타카’말이다.” 최태훈은 사물도 ‘가문’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편의에 따라 사물은 ‘부엌 싱크대 패밀리’ ‘욕실 선반 패밀리’ 등으로 그룹핑된다. 이전까지 작가는 <세나 구성>, <스쿠브 구성>, <알고트 구성> 등 비슷한 디자인끼리 짝지어진 이케아 라인을 모아서 활용하곤 했다. 반대로 <톤>에서는 전혀 관련 없는 쓰임새를 가졌지만 컬러감이 비슷한 사물이 만나 ‘대안 가족’을 이뤘다. 원래 용도대로 팔려 갔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다양한 사물의 집합체가 우레탄 폼의 결속력을 빌려 ‘살’을 맞대고 있다. / 김해리 선임기자

<살(SAL)-P2> 우레탄 폼, 담요, 커튼, 매트, 베갯잇 370×964.5×335cm 2023

<살(SAL)-P2>우레탄폼,담요,커튼,매트,베갯잇370×964.5×335cm2023

최태훈

최태훈/1982년서울출생.서울시립대학교환경조각학과학사동대학원졸업.GCS(2022),오시선(2021),탈영역우정국(2020),SeMA창고(2019),스튜디오148(2018)등에서개인전개최.<프레이머>(샤워2023),<조각충동>(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2022),<트리플링스:복각본들,어제글피로부터>(문화역서울2842021),<인저리타임>(뮤지엄헤드2021)등의단체전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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