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영국 포토그래퍼 시그 하비(Cig Harvey, 1973년생). 그는 평범한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숭고’의 찰나를 포착해 왔다. 작가의 렌즈는 짙은 어둠이 걷히는 미명의 시간, 타들어 가는 양초, 명멸하는 불꽃, 시들어 썩어가는 꽃잎 등 끝내 사그라지는 것들이 내뿜는 생명의 여운을 응시한다. 하비는 과거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섰다. 그 이후 끔찍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마주할 때 터져 나오는 원초적인 ‘숭고’를 화면에 담아내는 데 천착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결정적 요소는 바로 빛과 어둠의 대비다. 강렬한 채도와 연극적인 그림자가 빚어내는 심연의 프레임에는 삶의 욕망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 ‘타나토스’가 팽팽하게 맞선다. 이 긴장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하비의 화면은 아름다울수록 더 깊은 상실을 예감하고, 충만할수록 소멸에 가까워진다는 역설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행복은 늘 잠깐이고, 슬픔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러니 더 자주 멈추고, 더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사라지기 전에.
기억나지 않는 얼굴. 그러나 나란히 바라보았던 꽃 빛과 내음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창 위로 꽃과 얼굴이 포개지듯, 내 안에 잠겨있는 그 나날들.
뿌연 물안개가 수평선을 지운 자리.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연분홍 봄은 아직 나를 휘감고 있건만. 모래 위엔 발자국마저 사라지고….
잡으려는 것인가, 놓으려는 것인가. 풀잎은 묻지 않았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흔적만으로 충분하노니. 노을 아래, 만남도 이별도 하나로 물든다.
밤의 절정, 불꽃은 가장 찬란하다. 사랑하는 아이야, 너는 빛만 꼭 잡거라. 어둠이 너를 덮치지 않도록, 내가 이 밤의 끝을 지키고 있으리니.
한 줄기 바람, 한 아름 꽃을 안아 황금빛 길을 열었다. 오늘은 이곳을 걷고 싶다, 저 끝이 어둠인 줄 알면서도. 어딘가에서 또 바람은 불어와 꽃은 또 피리라.
놓아준 순간에야, 풍등은 어둠을 깨우는 작은 해로 떠오른다. 떨어진다고 모두 이별은 아니다. 내일의 태양으로 솟아 다시 만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