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실마리, 더딘 걸음 끝…
헬렌 프랑켄탈러(Hellen Frankenthaler, 1928~2011). 그는 전후 미국 추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여성 화가다. 1950년대 초, 캔버스에 묽은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소크 스테인’ 기법을 창안해 ‘후기회화적 추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촉각성을 지향하던 추상표현주의의 공식을 깨고 물감과 지지체를 일체화한 파격 실험이었다. 붓 자국, 안료의 물성을 지우고 색채의 일루전을 극대화해 서정적인 화면을 펼쳤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1960년대엔 아크릴릭으로 색면의 윤곽을 선명하게 다듬어 광활한 대지를 조감하는 지형학적 공간을 구현했다. “내 그림은 평면에 붙잡아 둔 폭발적인 풍경, 세계, 그리고 거리감이다.” 평생에 걸쳐 매체와 스케일을 넘나들며 조형적 변주를 거듭했지만, 프레임 밖으로 끝없이 팽창하는 무한의 감각은 늘 중심에 있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그의 개인전 <A Grand Sweep>(11. 18~2. 8)가 열렸다. 195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중력과 시간의 그림. ‘세계’는 그 우연에서 열린다. 무심한 선과 말간 얼룩….
금빛 물결 노래하는 해원. 운율 따라 춤을 추는 모래알. 숨찬 대지가 내뿜는 입김. 봄의 실마리는 이렇게 오나니. 더딘 걸음 끝, 만물을 간질이며….
몰랐다. 남몰래 내린 먼지가 흙이 될 줄은. 그가 품은 야윈 씨앗이 푸른 나무 될 줄은. 잎사귀의 숨결이 오색 구름 될 줄은. 마침내 굽이치는 산줄기로 만날 줄은.
타오르는 붉은 장막, 어제를 품은 자줏빛 밤그림자, 그리고 장대비 머금은 먹구름. 모질게 밀어내다 마주보나니. 부딪치고 깨져도 곁을 내어주는 ‘정’이라.
바다에 몸을 뉘인 하늘. 새와 구름도, 물고기와 파도도 새 여정을 서두른다. 경계 없는 푸른 꿈은 이제 흐르리라. ‘너’도 ‘나’도 하나되는 무한의 바다… 그 너머까지.
대지가 햇살로 물들다. 붉고 푸르른 생명이 스며드는 이 시간. 가늘게 떨리는 분홍빛 매화. 수줍게 내민 그 연약한 손끝. 너는 가장 먼저 온 봄이니.
곧은 길 휘어지고, 갈 곳 잃은 이슬 떨어져 얼룩이 되어도…. 그 우연한 궤적이 모여 대지의 맥박이 뛴다. 부딪치고 깨져 무너진 자리에서 꽃은 또 피어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