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게 묻는다, 우리의 생을

페이스갤러리 뉴욕, 영국 사진가 리처드 리로이드 개인전
2025 / 05 / 01

영국 출신의 사진가 리처드 리로이드(Richard Learoyd, 1966년생). 작가는 살아있는 존재가 정적인 사물로 굳어가는 과정을 포착한다. 그의 사진에서 인간과 자연은 생기가 사라진 정물처럼 빛바랜 육체와 텅 빈 표면으로 드러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엄중한 경고를 사진으로 현상한다. 이러한 주제는 형식과도 맞닿는다. 작가는 고대 광학 장치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직접 제작해, 필름 없이 빛을 곧바로 인화지에 새기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단 한 번의 노출로 완성된 이미지는 수정도 복제도 불가능하다. 생명의 유한성을 일깨우는 메멘토 모리가 공명하는 지점이다. 조형 요소 역시 그의 주제 의식과 긴밀히 연결된다. 절제된 색감, 정적인 구도, 균일하고 은은한 빛으로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를 화면에 소환한다. 그의 개인전 <A Loathing of Clocks and Mirrors>(3. 7~4. 26)가 페이스갤러리 뉴욕에서 열렸다. 시계와 거울을 모티프로 시간의 흐름과 자기 소멸을 사유하는 신작을 선보인다. 언제나 존재를 기다리고 있을 죽음. 그러나 끝내 외치는 불굴의 생이여…!

<Mirror, Eye> 카메라 옵스큐라 일포크롬 사진 53×44.6cm 2024

눈은 살아있다. 검붉은 상처 위로 눈은 살아있다. 얼룩진 마음과 휘청이는 길목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지 않고…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Cecilia Nude Red Dress> 카메라 옵스큐라 일포크롬 사진 122.1×99.1cm 2019

어둠이 빛을 삼키고, 몸은 병든 가지처럼 나부낄 때. 홑겹마저 던져 시들지 않는 불꽃을 피우리. 시간이여, 너는 가는가. 나는 여전히 붉고, 꺾인 목으로도 아직 길을 찾으리니.

<무제> 카메라 옵스큐라 일포크롬 사진 24.6×22.5cm 2024

기도하게 하소서. 벌거벗은 가슴에 얹힌, 저 애처로운 손이 홀로 남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게 하소서. 맞잡은 온기, 믿음이 움틀 때…. 마지막 사랑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무제>카메라 옵스큐라 일포크롬 사진 99.2×96.2cm 2024

시들고 부서진 것들아, 고개를 들어라. 비록 주검이 너를 감싸고, 숨마다 짐승 같은 어둠이 스며들지라도. 굽히지 않은 맥박 하나 생의 끝자락을 움켜쥐었나니….

<Nude and Lemons> 카메라 옵스큐라 일포크롬 사진 87.9×87.9cm(왼쪽), 87.9×44cm 2021

몸저눕고, 살이 식어도 나 내일을 노래하리라. 메마른 노란 열매. 시큼한 살에도 대지를 향한 희망 남아있으니. 넝마처럼 구겨진 몸. 시큰한 삶에도 희망의 시를 품으리.

<Last Light, Navajo Point(color)> 후지 크리스털 아카이브 콘택트
프린트 120×193.8cm 2023

비애를 견딜 수 없고, 애증을 짐 지지 못하고, 혼이 무너지는 순간. 가자, 저 머나먼 산맥으로. 수천 겹의 주름, 수만 결의 상흔에도 시간은 살아있다. 죽음에게 묻는다. 우리의 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