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예술,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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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s & Thorns>전 전경
“새로 문 연 술집인가? 들어가 볼까?…” 통유리로 훤히 트인 널찍한 공간. 포장마차에서 흔히 볼법한 새빨간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이 손님을 마중 나왔다. 이미 전날 밤 한바탕 파티라도 벌인 듯 늘어놓은 술병까지. 금싸라기 땅 강남 한복판에 차려진 이 ‘키치 주점’의 호스트는 작가 데이비드 허. 한국계 미국인인 그의 국내 첫 개인전 <Roses & Thorns>(9. 1~30)가 리얼레이션에서 열렸다.
리얼레이션은 지난 7월 삼성동에 오픈한 복합 예술플랫폼이다. 브랜드 팝업, 기업 행사, 프라이빗 이벤트 등을 위해 장소를 대관하고, 여기에서 얻은 이익으로 예술가를 지원한다. 리얼레이션을 이끄는 주역은 (주)피비엔제이의 장기환 대표. 미국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하고 아티스트 에이전시, 공간 개발, 엔터테인먼트 및 예술기획 씬에서 활동하고 있다. “좀 더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자에게 보여주고 싶어 리얼레이션을 개관했다. 겉보기엔 갤러리와 비슷할지라도, 운영 방식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예술과 비즈니스를 철저하게 분리한다. 작가 커미션이나 작품가 5대5 분배와 같은 갤러리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판매가 100%를 작가에게 전달한다. 작가 발굴과 양성에만 주력하는 것이다.” 리얼레이션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원래 편의점과 택배사였고, 주변에는 온갖 상업 시설이 즐비하다. 도보 10분 거리의 코엑스는 아트페어가 열리는 마켓의 최전선. 리얼레이션은 이러한 자본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세워 항해를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플랫폼
리얼레이션은 당장의 수익 창출에 몰두해 파이를 잘라 먹기보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새로운 파이를 만드는 비전을 세운다. 장 대표는 이 야심 찬 도전의 원동력을 ‘아이디어’에서 찾는다. ‘리얼레이션’은 ‘리얼(real)’과 ‘아이디에이션(ideation)’을 결합해 만든 조어로,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차세대 블루칩으로 성장할 작가, 해외에서 명성을 쌓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덜 알려진 작가에 주목한다. 다른 갤러리들과 경쟁할 마음은 없다. 한국은 글로벌 아트마켓에 비해 규모가 작아 여기서 경쟁해 봤자 제로섬 게임이 될 뿐이다. 아티스트가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서 파이를 늘려나가는 게 중요하다.”
리얼레이션은 전시장 설계도 독특하다. 모듈 개념을 기반 삼아 벽마다 다른 구조체와 마감재를 붙이거나, 조명과 스피커를 천장에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병풍식 거울을 넓게 펼치면 5평 정도의 방이 생긴다. 전반적으로 무채색 톤인 공간은 얼마든 다양한 색으로 칠할 수도 있다. “리얼레이션은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바뀌는 가변적인 베뉴(venue)다. 내가 미국에서 전시를 기획했을 때, 대관료를 지불했는데도 공간 사용에 제약이 많은 것이 불만이었다. 벽 도색이나 못질조차 어려웠다. 훗날 공간을 운영한다면 그런 조건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남다른 아이디어로 작업하는 작가라면 대관료 없이 적극적으로 서포트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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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s & Thorns>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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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ted> 캔버스에 수제 숯,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릭, 오일, 흑연 91.4×60.9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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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al By Fire> 혼합재료 30.4×22.8cm 2022
리얼레이션 첫 번째 전시의 주인공, 데이비드 허는 이민 1세대 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해 2010년 시카고로 이주하고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실크스크린을 전공했다. 회화, 판화, 콜라주, 3D 프린팅 등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오색 단청의 하양 검정 파랑 노랑 빨강을 시그니처로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두터운 컬렉터층을 보유할 정도로 떠오르는 샛별이지만, 한국에는 아직 이름이 낯설다. 장 대표는 2018년 유학길에 올라 전시기획을 막 시작할 무렵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작가를 발견했고, 이후 전시마다 발 도장을 찍으며 친분을 쌓았다. “데이비드 허는 2018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해 왔다. 그때부터 ‘언젠가 나랑 같이 전시하자’,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있다’라고 믿음을 주면서 전시 기회를 확보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한다. 그는 국내외 갤러리로부터 러브콜을 받아도 매번 거절한다. 갤러리에 소속되면 커리어가 안정되고 판매도 수월하겠지만, 그만큼 작품을 즐기는 층이 한정된다는 거다. 지금은 자기 작업을 알리고 좋아해 주는 관객 풀을 넓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장 대표는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을 선보이기 위해 항공비와 한 달 치 숙박비를 통 크게 지원했다.
이번 전시에는 데이비드 허의 예술세계를 암시해 주는 자유분방한 콜라주와 청자를 모티프 삼은 신작 페인팅이 출품됐다. 콜라주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은 칼 구스타프 융의 ‘인간 유형’에서 영감을 얻은 도상. 그중 호랑이는 아시아인, 늑대는 서양인을 상징한다. 나아가 신작 페인팅은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한’과 ‘정’을 주제로 내세워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했다.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청자에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멜랑콜리한 이미지로 새겨 넣었다. 전시장 한편에 조성한 포장마차 역시 한국 문화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퍼포먼스 겸 설치작품이다.
데이비드 허는 내년 9월 프리즈 기간에 맞춰 리얼레이션에서 두 번째 한국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장 대표의 꿈은 리얼레이션 해외 지점을 내는 것. “사실 큰 욕심은 없다. 데이비드 허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협업하는 작가 5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에도 해외로 보내면 더 잘할 것 같은 이들이 있는데, 머지않아 해외 지점을 열어 좋은 기회를 만들고 싶다. 아마도 로스앤젤레스나 캘리포니아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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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David Heo) / 1992년생, 미국 조지아주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시카고예술대 석사 졸업. 샌프란시스코 하시모토컨템퍼러리(2022), 시카고 버티컬갤러리(2021, 2020), 뉴욕 차츠키(2021), 시카고 바운더리프로젝트스페이스(2019), 신시내티 바스켓숍갤러리(2019) 등에서 개인전 개최. 반스, 시카고 불스 등 다수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현재 시카고에서 거주 및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