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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무한의‘형과색’

타데우스로팍서울,도널드저드개인전

2023/09/11

미니멀리즘의 개척자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작가는 회화와 조각, 예술과 사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수한 오브제’ 개념을 창시했다. 저드의 작품이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타데우스로팍 서울은 <도널드 저드>(9. 4~10. 20)를 열고 초기 회화, 대표 조각과 함께 한국 한지로 만든 목판화를 국내 최초 공개했다. 이번 전시는 저드의 아들이자 저드재단의 예술감독인 플래빈 저드(Flavin Judd)가 직접 큐레이팅했다. 그를 만나 저드의 예술세계, 한국과의 인연, 저드재단의 비전 등을 물었다. / 김해리 선임기자

— 10년 만에 열린 한국 개인전이다. 1960년대 회화, 1980~90년대 입체, 1990년대 판화까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가지고 왔다. 어떤 기준으로 출품작을 선정했는가?


FJ 보통 저드의 전시는 각 작품이 공간과 공명하는 방식은 물론 작품끼리의 관계를 고려하며 기획된다. 이번 서울 전시는 저드가 얼마나 다양한 매체를 사용했는지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출품작이 정해지면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감각에 의존해 배치한다. 만약 최선의 조합을 찾지 못하면 작품도 고통받고 관객도 작품을 어려워한다. 한번 작품을 집에 놓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럴 땐 회화든 판화든 구분 짓지 않고 인테리어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고려하지 않는가? 전시도 마찬가지다. 매체는 단지 카테고리일 뿐. 그리고 카테고리는 본래 상상의 개념이다.

도널드 저드 개인전 <도널드 저드> 전경 2023 타데우스로팍 서울

도널드저드개인전<도널드저드>전경2023타데우스로팍서울

<무제> 목판, 한지에 채색 각 60×80cm 1992~93/2020

<무제>목판,한지에채색60×80cm1992~93/2020

주한 미군에서 세계적 예술가로···
— 이번 전시의 백미는 저드의 한지 목판화다. 국내 최초 공개다. 저드를 조각가로 알고 있는 관객이 많을 텐데 사실 작가는 이른 시기부터 판화를 다뤄왔다. 특히 평면에서 입체로 작업을 변모하는 전환기(1961~63)에 판화를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바꿔 말해 그에게 판화는 물질성과 공간성을 탐구하는 매개체였다. 판화가로서의 저드는 어땠는가?


FJ 재밌게도 저드는 본인을 ‘페인터’라고 여겼다. 마찬가지로 판화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중요한 일부다. 미술계에서 받은 첫 수상도 판화였을 정도로 초기부터 판화를 다뤄왔다. 판화와 입체를 병행해 작품을 전개했고 심지어 후기에는 상당히 유사한 회화와 판화를 만들기도 했다. 저드의 아버지이자 나의 할아버지인 로이 저드도 판화를 제작했는데 그가 직선을 구현하는 도구인 라우터를 구매했을 때 저드의 판화가 급속히 변화했다. 저드에게 판화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 저드는 1990년대 판화작업을 재개하고 색채의 상호 작용을 탐구했다.
각기 다른 색채의 사각형을 찍으며 그에 따라 공간이 전진, 후퇴하는
현상을 실험했다. 색과 선, 배경과 형상이 만들어내는 원근감을 탐구했다.
판화의 방법론은 저드의 예술세계를 읽는 중요한 실마리다.


FJ 저드의 작업은 ‘색채와 공간’이라는 두 키워드로 전부 설명된다.
때문에 ‘미니멀리즘’이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다. 저드의
작품은 색채 효과에 따라 그 퀄리티가 결정된다. 그에게 ‘나쁜 예술’이란
다른 누군가 했을 법한 작품처럼 보이는 예술, 그리고 공간과 색채가 품은
가능성을 소거하는 예술이다.


— 저드는 의외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46~47년 미군 공병으로
한국에서 복무했고 한국인 인부와 함께 미군 부대의 용광로를 건설했다.
저드는 한국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나?


FJ 저드는 18살 무렵 군대의 명령에 따라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그는 측량사로 근무하다 김포 공군기지의 보일러 시설 건설을 감독했다. 저드가
회고하길,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인부들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자신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인부들과 무척 친해졌는데 귀국하고 나서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저드는 그의 첫 해외 방문지였던 한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뉴욕에도 가본 적 없는 아이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이질적인 나라와의 ‘접촉’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깼을 거고 덕분에 그가 축적해 온 미국 중심의 문화적 경험이 송두리째 흔들렸을 거다.

<무제> 캔버스에 유채 102.2×91cm 1960

<무제>캔버스에유채102.2×91cm1960

<무제> 양극 처리한 알루미늄에 아크릴릭 시트 각 50×100×50cm 1988(벽), <무제> 나무에 아크릴릭, 알루미늄 튜브에 애나멜 121.9×210.2×121.9cm 1963(바닥)

<무제>양극처리한알루미늄에아크릴릭시트50×100×50cm1988(벽),<무제>나무에아크릴릭,알루미늄튜브에애나멜121.9×210.2×121.9cm1963(바닥)

— 이후 저드는 화가 윤형근, 야마구치화랑 대표 야마구치 다카시, 인공화랑 대표 황현욱 등과 교류하며 1991년 한국 첫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저드와 윤형근은 함께 안동을 여행할 만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윤형근의 제안으로 저드가 한국 한지를 이용해 목판화를 시도한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저드와 윤형근의 스토리를 들려달라.


FJ 둘은 좋은 사이였다. 아주 가까운 친구라기보다는 서로의 작업을 응원하던 예술가 동료로서 말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저드가 한지의 거친 표면에 매료되긴 했지만 판화 제작에 적합하진 않았다고 한다.


— 당신은 저드재단의 예술감독이자 그의 아들이다. 1994년 저드의 갑작스러운 작고 이후 ‘위대한 유산’을 관리, 감독하게 됐다. 당신은 그의 작업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


FJ 저드재단의 역할은 저드 작품에 대한 ‘경험’을 지키는 데 있다. 새로운 도시를 방문하거나 이질적인 문화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세계는 넓어진다. 예술가의 작품을 보는 일도 비슷한 영향을 준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저드라는 사람을 추모하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그의 작품, 공간, 글을 느끼는 일이다. 우리 재단의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도널드 저드

도널드저드/1928년미국미주리주출생.1946년1년간주한미군으로복무했다.귀국콜롬비아대에서철학과미술사,뉴욕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회화를공부했다.1959~65년까지미술비평가로활동했다.1964년『특수한오브제』를저술해사물과예술의관계를재고했다.1968년뉴욕휘트니미술관을시작으로세계주요기관에서전시를열었다.1968년뉴욕의101스프링스트리트건물과1973년텍사스말파의건물을구입해스튜디오와주거공간으로활용했다.1977년작품,공간,아카이브를연구관리하는저드재단을설립했다.1994년타계했다.

아트프라이스(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