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나예요”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서브스턴스>는 호러와 페미니즘을 결합해 큰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 출신의 여성 감독 코랄리 파르쟈는 그로테스크한 신체 이미지로 이상적인 겉모습에 집착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필자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자기 해방에 도달하는 주인공을 비체의 미학으로 읽어낸다. /
한때 빛났던 스타 엘리자베스는 50세 생일이 되던 날 고정 프로그램 ‘모닝 쇼’에서 퇴출된다. “그동안 정말 멋졌어요(You ‘were’ amazing)”라는 꽃다발 메시지와 함께. 좌절한 그는 우연히 의문의 약물 키트 ‘서브스턴스’를 접하고, 젊고 아름다운 ‘수’와 함께 일주일씩 교대로 나눠 사는 새로운 삶을 얻는다. 약물 회사가 계속해서 경고했던 사실은 새로운 당신도 결국 당신이라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 이치와,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다. 새해 전야 무대를 준비하게 된 수에게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They ‘are’ going to love you)”이라는 꽃다발과 카드가 배달되는데, 이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처지를 선명히 가른다.
러닝 타임 전체를 지배하는 미학은 그야말로 비천한(abject) 것이다. 오물과 피, 내장처럼 더럽고 추하고 끈적거리고 역겹고 기괴하고 냄새나고 비천한 모든 것을 프랑스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라고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존재 자체로 급박하게 추방되어야 하는 애브젝트였다. 쌍생의 수가 그토록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버석하고 주름진 몸, 원래 신체와의 균형을 위반한 탓에 갈수록 빨라지는 노화의 흔적, 깊어지는 보라색 농양…. 시각적 비천함과 함께 영화는 엘리자베스를 TV 앞에서 시간만 죽여야 하는 존재로, 칠면조의 내장을 비틀어 꺼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존재로 한층 더 더럽고 추하게 그려낸다. 그런 엘리자베스를 비웃듯, 수는 매끈한 젊음과 육체적 매력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둘의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하나로 존재하는 순간은 단 한 번이다. 바로 늙고 추한 이종의 자신을 피범벅으로 만들어버리던 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 둘의 온갖 신체 부위가 이접되고 뒤틀린 괴물이 될 때다. 여기서 영화가 이전까지 쌓아온 비천함의 의미는 전복된다. 괴물이라고 경악을 쏟아내는 관중 앞에서 ‘엘리자베스-수’는 “나예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이 하나임을 끝내 믿지 않는 새해 전야 무대의 관객 전부에 검붉은 피를 난사한다. 징그럽고 불결한 피가 사방을 뒤덮으며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장면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이는 영화 내내 그토록 갈구해 왔던 응시의 대상이자 시각적 쾌락을 주는 존재, 그리하여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목구비가 엉겨 붙고 어느 곳 하나 제 위치에 있지 않은 기괴한 모습이지만, 엘리자베스와 수에게는 그 모든 모습이 ‘나’다. 축적된 분노를 뿜어내는 해방된 자신(one)이다.
<서브스턴스>가 ‘보디 호러’인 이유는 괴상하고 흉측한 신체와 부산물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역겨운 인상을 주는 까닭일 테다. 그러나 그 시각적 비천함에서 비롯된 공포는 곧 여성을 옥죄어 온 가부장적 시선에 맞서는 무기다. 한나 윌키는 암으로 한쪽 가슴을 절제한 어머니와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자신의 투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 늙고 병든 여성의 몸을 사실적으로 보여줬다. 리우 수시라자는 오물을 연상시키는 갈색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뒤집어쓴 채 살찐 비만 여성의 몸을 가감 없이 드러냈으며, 이미래는 끈적한 점액질이 흐르는 키네틱 조각으로 파편적 살갗과 내장을 구현해 그간 은폐돼 온 신체 감각을 노출했다. 비천한 여성-괴물이 되어서야 자기 입으로 ‘나’를 말하게 된 엘리자베스-수의 결말은 잠깐이나마 후련함을 주지만, 처절한 극단으로 향해야만 비로소 자기가 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씁쓸한 뒷맛을 함께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