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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비인간의인간화

전북도립미술관,특별전<미안해요,프랑켄슈타인>

2023/09/06

전북도립미술관에서 대형 기획전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7. 28~11. 26)이 열렸다. 전시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반성으로 인간과 기계, 자연과 기술의 공존을 꿈꾼다. 필자는 사물, 기술, 동물, 환경 등을 비인간 행위자로 규정하고 괴이하고 아름다운 혼종적 네트워크를 꿈꾼다. / 이 민 수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에 등장하는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제작자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전기로 자신의 실험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순간, 막상 그 거대하고 끔찍한 형상에 공포를 느껴 이름을 붙이기는커녕 혼비백산해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서 괴물은 그저 피조물을 뜻하는 ‘크리처(the creature)’라고 불린다. 다만 이후 연극과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된 크리처의 서사와 이미지가 작품을 대표하게 되면서 프랑켄슈타인은 곧 그를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사실상 크리처의 창조자(the creator), 즉 아버지에 해당하는 빅터의 성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점에서 크리처를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주 틀린 경우는 아니다.

쥬스틴 에마 <공존(Co(AI)xistence)> 싱글채널비디오 12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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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와 펠릭스 <카메라,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발견된 액자, 아카이벌 피그먼트 인화 가변크기 2016~2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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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개도사 1> 스티로폼에 석고,  에폭시 퍼티, 알루미늄 90×45×170cm  2021

이승희<개도사1>스티로폼에석고,에폭시퍼티,알루미늄90×45×170cm2021

새삼 프랑켄슈타인이 누구인지를 따지게 된 이유는 제목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걸까. 미안함의 상대는 크리처일 수도, 혹은 빅터일 수도, 소설의 부제를 힌트 삼아 근대 이후 프로메테우스를 꿈꿔온 수많은 프랑켄슈타인이나 그의 크리처들 일 수도 있다. 문제는 화자(話者)인데, 어쩌면 이걸 파악하는 게 전시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혼종의 시대


지난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해제하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도 속속 코로나19 엔데믹을 선언했다. 3년 넘게 지속됐던 팬데믹은 끝이 났지만, 우리의 삶과 인식은 이전과 비교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바이러스의 창궐이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인수 공통 감염병의 증가와 연관되고, 인간과 물류의 글로벌 이동을 통해 급속히 전파되며, 이는 인종 차별의 문제와 불평등을 가시화했다. 이른바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존재가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목격한 것이다.

놀랍게도 인류 역사에서 늘 함께한 비인간 존재를 이토록 의식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온실가스 농도의 급증, 질소 비료로 인한 토양 변화 등 인간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물리, 화학적 시스템이 바뀐 것을 두고 2000년대 초에 학자들은 ‘인류세’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이에 2023년 현재,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 시기이자 약 1만 1,700년간 계속돼 온 ‘홀로세’를 끝내고 ‘인류세’의 지정을 공식화하는 논의가 한창이다. 지난해에 작고한 브뤼노 라투르가 저서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서 언급했듯 “이제 사람들은 지구의 모습이…‘산업화된 인간’에 의해 깨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비인간 존재들이 인간과 연결되고, 관계 맺고, 공존하는 방식을 질문한다. 인류세에 접어든 시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인간과 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깨달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 오늘날의 인문학에는 ‘휴먼’을 벗어나 탈인간 중심적 방식으로의 전환과 접근이 필요하다. 예술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 전시가 제시하는 방식이 그 예시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가 근대인의 이성으로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고 없애려 한 크리처는 오히려 죽은 빅터를 안고 북극의 얼음 속으로 사라진다. 비인간적인 빅터와 인간적인 크리처, 둘은 서로에게 미안한 관계인 듯싶다.


5개 섹션에 전시된 33점의 작품은 저마다 사물, 기술, 동물, 환경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떻게 인간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라는 부제의 1전시실에서 주목할 작품은 바로 쥬스틴 에마의 <공존(Co(AI)xistence)>. 딥러닝 시스템을 바탕으로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간의 움직임이 만나 섬세한 동작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풍긴다. 거기에선 단순한 몸짓의 복제가 아닌 감정의 교류와 같은 무언가가 느껴진다.

이신애 <우당탕> 모조지에 프린트 가변크기 2014

이신애<우당탕>모조지에프린트가변크기2014

베른트 린터만, 페터 바이벨 <유 아 코드> 인터렉티브 컴퓨터 외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7

베른트린터만,페터바이벨<유코드>인터렉티브컴퓨터기반설치가변크기2017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전 전경 2023 전북도립미술관

<미안해요,프랑켄슈타인>전전경2023전북도립미술관

2전시실은 ‘존재-이다’라는 부제로 작가 다섯 명의 작품 총 6점을 전시했다. 그중 오민수의 <제자리 구르기>는 컨베이어 롤러 위에 놓인 박스가 반복적으로 구르다 마침내 멈추고 마는 오작동을 재현한다. 이는 인간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계마저도 무한 반복 끝에 소진되는 물류 시스템을 꼬집는다. 또 다른 작품 베른트 린터만과 페터 바이벨의 <유 아 코드(YOU:R:CODE)>는 인터랙티브 컴퓨터 장치를 기반으로 한다. 6개의 커다란 패널 앞에 선 관람자의 정보가 코드화되어 각 패널 고유의 정보로 변환되는데, 인간 존재가 텍스트와 수치로 사물화되는 과정이 꽤나 유머러스하다.


‘지금, 여기’를 부제로 3전시실에 단독 출품된 히토 슈타이얼의 영상설치 <이것이 미래다>는 데이터가 중심이 된 상상적 미래의 한 단면을 제시한다. 삶의 많은 시간을 디지털에 연결해 살아가는 오늘날의 인류가 기술, 데이터와 맺는 정량적 관계는 어마어마하다. 슈타이얼은 빅 데이터 기반 콘텐츠를 비판하거나 희화화한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다소 난해한 작품 앞에 선 관객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금, 여기’는 인스타그래머블한 포토존일 수도 있다.

나나와 펠릭스의 <카메라, 담배, 위스키, 그리고…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시간은 200여 개의 액자에 담겨 관람자를 맞는다. 작가는 수많은 도시를 돌며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사진과 사물을 모았다. 작가 개인의 시간, 사진 또는 사물에 담긴 시간, 그리고 관람자의 시간이 연결되며, 공유된 시간과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도 비인간 행위자로 간주할 수 있다. 한편, 안성하의 대형 회화는 화가와 그가 그리는 사물, 붓, 물감, 캔버스 등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연결된 네트워크의 예시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벗어나, 연결된 혼종의 네트워크로서의 사물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5전시실의 부제는 ‘관계망, 하이브리드’. 독특한 사운드와 분위기로 관람객의 눈길을 끈 작품은 단연코 류성실의 <불타는 사랑의 노래>다. 작가는 가상의 캐릭터를 앞세운 블랙 코미디 서사로 동시대 문화 현상과 자본주의 체계의 민낯을 폭로하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만큼은 다른데, 류성실 작업의 미덕은 더없이 신박한 방식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탈피하는 데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포용적인 인간의 미래상을 그리는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의 입장에 부합하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어쨌든 이 마지막 챕터의 핵심은 인간 중심주의로 인해 배제되었던 존재와의 ‘공존’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상호 의존적 관계로서 대지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안성하 <22-09, 담배> 캔버스에 유채 162×112cm 2022

안성하<22-09,담배>캔버스에유채162×112cm2022

류성실 <불타는 사랑의 노래> 싱글채널비디오 10분 2022

류성실<불타는사랑의노래>싱글채널비디오10분2022

다섯 개의 전시장을 돌아 나오면서 로비에 설치된, 전시의 초입에 해당하는 백남준의 <케이지의 숲, 숲의 계시>를 다시 음미해 본다. 작가는 1992년에 사망한 존 케이지에게 애도를 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생전 케이지의 이미지 등이 송출되는 텔레비전 모니터 여러 대를 나무에 새장처럼 매달아 인공 숲을 조성했다. 그야말로 ‘함께 되기’. 인간과 기계, 자연과 기술의 공존이자 혼종적 네트워크와 다름없지 않은가.

아트프라이스(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