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공동의 밤이 있다
지난 12월, 전국이 혁명을 외치는 목소리로 들끓었다.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 행렬이 이어졌다. 젊은 사진가 황예지는 그 뜨거운 현장을 발로 뛰며 사진으로 포착했다. 반짝이는 시민의 ‘응원봉’과 경찰의 형광 조끼, 고속 도로를 점유한 경운기, 혜화역을 메운 휠체어까지. 작가는 지난 3개월을 되돌아보는 사진과 에세이를 전한다. 차디찬 길 위에 모인 따뜻한 연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간절한 목소리….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직후. 국회 앞에서 경찰과 시민이 대치했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 평일엔 보통 늦은 시간까지 사진 수업이 이어진다. 여대 시위, 알코올 중독, 친구의 죽음…. 모두 각자의 최전방에서 사진을 찍는다. 한 친구가 5·18광주민주화운동 시위대의 두 번째 줄에 있었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를 무참하게 잃고, 말을 아끼는 아버지라고. 광주에서 만났던 사람은 오월만 되면 피부에 피멍이 올라온다고 말한 적 있다. 꿈에서는 죽은 이의 관이 활짝 열린단다. 그런 장면을 둥글리다가 밥을 먹었다. 핸드폰이 꺼져있었는데, 같이 밥 먹던 사람이 계엄이라고 말해줬다. 계엄, 이것이 다시 깨어날 수 있는 단어였나? 카메라를 챙겨가 사진을 찍었다. 망령을 보고 왔다고 생각한다.
2024년 12월 14일, 탄핵안 가결. 괴로운 시절과 상냥한 시절이 함께 온다는 사실이 나를 아주 미쳐버리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절망은 빠르고, 희망은 넓게 드리우고. 연말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들의 발표를 기다리며 몇 군데 여행이나 다니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시간의 장력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았나. 수업 덕에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집회, 각자가 쥐고 사는 과거나 죽은 자에 대해 알아간다. 최승자의 시가 계속 입에 맴돈다.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모른다. 부끄럽다. 육체, 육안. 길의 시간이나 겨울바람을. 부끄러움을 빌미로 눈이 선연해지기를 바란다.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트랙터 시위와 전봉준투쟁단. 트랙터의 깨진 유리가 계속 마음에 걸려 그곳으로 갔다. 파들파들 떠는 여자들 사이에서 나도 떨었다. 혼자 온 내게 방한 용품이 쏟아졌다. 소녀들은 “투쟁으로 인사드립니다. 투쟁!”이라고 외쳤다.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복직 투쟁 도보 행진에 함께한 뒤 그에게 내 책을 준 적이 있다. 이후 미류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46일간의 단식 투쟁을 마칠 때, 김진숙이 내 책을 인용했다. “내 피까지 흘린 사람아, 우리 봄이요. 우리 이제 봄이요.” 싸움 이후 울며불며 개인전을 만들었다. 전시를 본 혜원 활동가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구나’ 느꼈다고 엽서를 보내왔다. 나는 광장에 있었구나. 계속 있어야 했구나. 협소해지지 말아야지. 길에 있을 때면 많은 사람이 떠오른다. 뼈가 아린 추위, 연대가 흉곽에 정확히 새겨지는 경험. 내가 치사해질 때, 이 경험이 내 머리채를 사정없이 낚아채겠구나.
남태령에서 밤새고 돌아와 사진 한 장을 꼭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피부와 입술이 부르트고 추레한 얼굴. 현상된 사진 속 내 모습이 풀 죽은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다 났다. 아침은 지워버리기 십상이었는데 요즘은 아침때를 제법 본다. 해 뜰 때와 노을 질 때 색의 온도가 똑같지, 참. 아침 녘에 삶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 농민들이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상경했다.
2025년 1월 17일,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시위.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온 주간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 갔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어려워진 순간부터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 정물로 취급했다. 박경석 상임대표가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쓸모없어진 기분을 느낄 때가 분명히 올 것이라 말했다. 쓸모. 역사에서 부대끼는 광경을 보다가 퇴거 없이 역을 빠져나왔다. 경찰과 시위대가 줄지어 가는 길목. 찜기에서 연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과거가, 옛 도시가, 구전과 침묵이 우르르. 난 그 기체를 봐야 했다.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2025년 1월 17일 혜화역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시위. 박경석 상임대표가 지하철 집회 불가에 대한 위법성을 외치고 있다.
“내 피까지 흘린 사람아, 우리 이제 봄이요”
“땅이 분노할 줄, 흔들릴 줄 알고 있으니까, 난 날 둘러싼 땅이 흔들리는 게 좋아.”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나는 도착해 있다.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하루하루를 지탱하기 어려워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국회 앞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밖에 못 가겠네요. 길을 막아놔서.” 자정 무렵 여의도공원 부근, 택시에서 내렸다.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이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이미 많은 인파가 길 끄트머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묵묵히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 사이에 꼈다. 하늘로 둥글게 솟아오른 건물과 담장, 끝에 선 사람들, 깃발과 확성기…. 일사불란한 장면이 만들어졌고 나는 얼떨떨하게 그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가 많았고 발이 좀 시렸다.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무엇이 이다지도 선연한지, 무엇이 이다지도 절망스러운지. 내게 도래한 장면은 새로 태어난 장면이던가, 혹은 예견된 장면이던가. 영화의 다음 장면이 눈에 훤히 그려지는 것처럼, 처음 만난 현실이 꿈에서 본 세계의 조각일 때처럼 어떤 일그러짐은 낯이 익다. 화면 너머로 늘어 가는 숫자를 보다가 눈이 벌게진 등굣길. 그 숫자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쩌면 미래에 마주칠 누군가, 소중한 우연이었기에 내 미래는 차츰 부식되고 있었다. 길거리와 건물, 기계, 우는 사람과 지나치는 사람, 리본과 리본…. 눈을 돌리고 감지만, 우리에겐 공동의 밤이 있다. 그 밤은 부산하게 흩어져 홀씨가 됐다. 자장자장, 흩날렸다.
밤의 불길함을 아는 이들은 잠들기를 힘들어했다. 자는 데 알약과 셀 수 없이 많은 뒤척임이 필요했다. 자신을 증명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쓰다가 침대 위에선 존재감이 미미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곤 했다. 불면을 호소하던 이들이 담장 앞에 매달려 있었다. 길거리로 나와 은박지를 둘러싸고 밤을 지새웠다. 목청 높여 여기 존재함을 밝혔다. ‘나, 여기, 존재하노라.’ 어쩌면 불면이 아침을 지키는 힘이구나. 뒤척였던 밤을 위로받는다. 그날 후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나가보곤 했다. 얼추 나와 비슷하게 절망적인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희망보다도 더 공고히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깡패처럼 위악을 퉤, 뱉어버리고 싶었다. 조금 더 나은 사람, 잘 싸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슬픔으로 몸이 가득 차 ‘펑’ 터져버리는 게 아니라 분노하고 싶었다. ‘젊은 친구들 대신 우리가 죽자’며 서로 팔을 동여매는 국회 앞 중년의 여성들에게서, 시린 아스팔트에서 벌벌 떨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여성들에게서 케케묵은 질문의 답을 봤다. 공동의 밤이 다른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게 보였다. 누군가의 선창과 함께 막혀있던 길이 뚫리기도 했다. 내가 본 밤의 풍경은 분명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되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반딧불이가 하나둘, 하나둘… 도착해 있다. 춤을 췄다. 흔들흔들, 날 둘러싼 땅이 흔들리는 게 좋았다. 땅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이 밤을 수호했다는 사실을, 이제 안다.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경찰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농민의 트랙터 유리창을 깼다.

2025년 1월 4일 한남동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구속 촉구 집회.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추위에 떠는 시민을 위해 휴식 공간을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