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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공포’의역습

제20회에르메스재단미술상수상,김희천개인전

2024/09/05

김희천 프로필

김희천/1989년광주출생.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예술사졸업.런던헤이워드갤러리(2023),아트선재센터(2019),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2018)등에서개인전.카이로비엔날레비엔날레상(2019),두산연강예술상(2016)수상.현재서울에서거주활동.

김희천은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영상작가이다.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 등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변화시킨 시공간의 경험과 인식을 영상으로 제작해 왔다. 특히 증강 현실, 가상 현실, 게임 엔진, 페이스 스왑 등 누구나 재미로 사용해 봤을 법한 기술을 활용해 크게 주목받았다. 그가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전으로 <스터디>(7. 26~10. 6 아뜰리에에르메스)를 열고 동명의 신작을 발표했다. 첨단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두던 그가 이번에는 돌연 저화질 카메라를 들고 실사 촬영에 나섰다. “기존의 내 작업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는 것으로 읽혀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미 기술은 인간 사회에 깊이 관여해 있으니 경계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우리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이번 전시에서는 ‘김희천’ 하면 ‘기술’이라는 기대와 감상에서 한 번쯤 벗어나 보고 싶었다.”

2채널 비디오로 구성된 <스터디>의 테마는 ‘공포’이다. 김희천과 공포. 혹자는 이를 뜬금없는 조합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의 영상에는 분명 으스스하고 기괴한 면이 있었다. 가령 대표작 <썰매>(2016)는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실제 경험에서 출발해, 개인 정보 유출의 불안감을 다룬 작품이다. 작은 기계에 담긴 개인 정보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잠식해, 거리에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작가의 얼굴로 바뀐 끔찍한 상상을 영상으로 구현했다. 엉성하게 뒤바뀐 얼굴 이미지가 ‘언캐니’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김희천은 과거 작업에 숨어있던 공포의 모티프를 극대화해 이번 신작을 제작했다.

<스터디> 스틸

<스터디>2채널비디오,사운드40분2024스틸

<스터디> 스틸

<스터디>2채널비디오,사운드40분2024스틸

너의 목소리만 들려

<스터디>는 공포 영화의 문법과 형식을 표방한다. 시놉시스는 이렇다. 고등학교 레슬링부 코치 찬종은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는 전국 레슬링 대회라는 중요한 경기만 치르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대회를 앞두고 선수 몇 명이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찬종은 사라진 선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학부모가 항의하자 그제야 훈련 녹화 영상을 확인하지만, 행방불명된 선수와 스파링을 뜨던 선수는 허공에 대고 몸짓을 할 뿐이다. 겁에 질린 찬종은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진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는 찬종의 모습으로 영상은 막을 내린다. 깜짝 놀란 관객이 비명을 내지르며 전시장을 황급히 뛰쳐나간 해프닝이 벌어질 만큼, <스터디>는 그야말로 한 편의 공포 영화에 맞먹는다.

그럼 신작 제목은 왜 ‘스터디’일까? 이는 김희천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극영화 형식의 연구다. 이전까지 작가는 직접 겪은 사건에 기반해 영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화자가 작가의 대변인이었다. 반면 <스터디>는 극영화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내러티브를 짰다. 대사에서도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배제했다. 다른 하나는 스터디 모델이다. 김희천은 에르메스 재단 지원으로 다녀온 파리 답사에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안토니 곰리의 연구 모형에 영감을 받았다. 과정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상작가에게 스터디 모델이란 무엇일지 고민했다. 이에 영상의 챕터 제목으로 아상블라주, 모델링, 리허설 등 조각, 건축적 요소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붙였다. 각 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영상의 스터디 모델을 실험하는 역할을 한다.

<스터디> 전경

김희천개인전<스터디>전경2024

홈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저화질 화면, AI로 서툴게 삭제한 사람의 흔적, 학교라는 장소가 주는 불안한 감수성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공포감을 유발한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요소는 바로 ‘소리’이다. 눈앞의 장면은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지만, 귀는 완벽히 닫을 수 없다. 실제로 영상의 절반가량은 암전된 채 등장인물의 목소리로만 전개된다. 공포극에서 소리의 중요성은 찬종의 대사에서도 강조된다. “운동 끝나고 나면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들. 많은 것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이 소리는 사라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폐에서 성대를 타고 입으로 나오며, 진동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텅 비었다”라고 말하며 정신적 죽음 상태를 묘사하는 찬종도 들려오는 소리를 막을 수 없다. 사라진 선수의 스파링 영상에도 그들의 소리만은 남아있다.

근래의 공포 영화가 이전만큼 무섭지 않은 원인을, 모든 현상이 기술로 설명되기 때문이라고 답한 김희천의 본격적인 ‘공포 스터디’. 작가는 오히려 어떤 기대도, 서사도 발생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야말로 ‘공포스럽다’고 여긴다. 고도화된 디지털 기술이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현실에서 <스터디>는 판타지로 뻗어 나가는 탈출구를 연다. 불완전한 기술로 형성된 세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감이 우리는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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